어벤져스- 마블이 꽃 피운 국화꽃 한 송이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도 울었나 보다

-‘국화 옆에서’, 서정주-

 

근래 메이드 인 마블 코믹스 표 영화를 보던 내 마음을 표현해준 것은 서정주 형님의 이 시 한 구절이었다. 제아무리 매니아가 아니라면 진정한 맛을 느낄 수 없는 영화라고 하지만 아이언 맨 2부터 토르, 캡틴 아메리카로 이어지는 마구잡이식 재고 대방출, 찍고보자식 영화 완성도의 꼬라지는 그야말로 암담한 수준이었다. 아니, 그건 매니아란 변명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배트맨과 엑스맨의 완성도는 원작을 보지 않은-과연 영화 붐을 타고 미국산 코믹스들이 번역 되기 전에 원작을 본 이들이 몇이나 되겠는가-이들도 충분히 감동할 수 있게 만들지 않았던가.

그리고 드디어 2012년 세계 종말이 오기 전에 등장한 어벤져스. 대체 어떤 세기의 대작을 만들었길래 앞의 작품들을 그렇게 분탕칠 했는지 수능 시험 성적표를 앞에 둔 수험생 아니 재수생 마냥 내 가슴이 다 설레였다.

어벤져스는 분명 마블이 빨리 보여주고 싶어서 안달 났던 것이 이해가 갈 만큼 평일 관람료 8000원을 훌~쩍 뛰어넘는 재미를 던져준 작품이라 하겠다. 앞서 마구 뱉아내던 작품들을 꾸역꾸역 보느라 딱딱하게 굳어버린 내 말초신경을 시원스레 경락 마사지해주었다. 그러나 어벤져스는 홀몸이 아니다. 앞서 3개의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등장한 작품이 아니던가. 나 역시 울며 겨자 퍼먹는 심정으로 앞선 작품들을 다 보았기 때문에 어벤져스를 향한 나의 기대치는 평일 관람료 기준 아이언맨2(8000)+토르(8000)+캡틴 아메리카(8000)이 포함된 32000원이었다. (안타깝게 어느 한 작품 조조로 보지 못했다.) 그래서 과연 어벤져스가 나에게 32000원 치의 기대감을 만족시켜 주었냐고 한다면 글쎄다. 연애에서도 상대방과 밀고 당기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보스급인 사슴머리의 존재감은 옥의 티가 아니었을까 한다. 기껏해야 헐크의 1회용 개그 소재 정도였으니 이렇게 폼 안나는 보스는 오랜만이다. 주인공들이 워낙 넘사벽이라 적과의 싸움보다는 지들끼리 싸울 때 오히려 더 땀을 쥐는 긴장감을 느끼게 해준 것도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래서 나의 점수는 32000원 만점에 24000원까지다. B급도 아닌 C급 특촬물스러웠던 영화 캡틴 아메리카는 지금 생각해도 안주 없이 소주 한 병 까게 만든다.

니들이 진정 히어로라면 지구의 미래를 걱정하기 앞서 우리의 호주머니를 생각해서 앞으로 이 이상의 수준으로 3편 정도 더 나올 수 있게 혼신의 힘을 다해주길 바라는 바이다.

by self_fish | 2012/05/17 12:48 | 영화대담실 | 트랙백 | 덧글(1)

아빠그림

36개월이 된 딸아이는 이제 남자, 여자를 구별할 수 있다.그래서인지 나와 함께 목욕을 할 때면 종종 내 고추에 관심을 보인다. 아이의 발달에 따른 당연한 과정이지만...당하는 나는 좀 부끄럽다. --; 저번 달에는 아빠를 그려달라고 했더니 요렇게 그렸다. 
뭔가 특이한 점을 발견하셨는지?
맞다. 아래 쪽에 노란색으로 칠한게 아빠 고추란다..*-_-*

아이의 뛰어난 관찰력과 표현력에 경악(?)하고 말았다.


by self_fish | 2012/05/15 19:46 | ▶ 육아만감 | 트랙백 | 덧글(2)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조개화석-1부

레오나르도는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과 같은 세기의 걸작을 비롯하여 예술, 수학, 물리학, 해부학, 건축학, 공학, 광학, 천문학, 지질학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분야를 넘나들던 호기심 대마왕이자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천재였다.

레오나르도가 사후에 남긴 것은 비교적 적은 15점의 회화 작품과 방대한 양의 소묘와 메모다. 그러나 당시 그의 육필 문서들은 매우 가까운 지인 외에는 동시대인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며, 16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그의 유산을 상속한 프란체스코 멜치Francesco Melci가 회화에 관련된 문서를 선별해서 엮은 [회화론]을 내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1570년 멜치가 죽은 직후부터 다 빈치의 노트와 메모들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서유럽 각지의 왕족, 귀족의 서고에 고이 쳐박히게 되었다.

지금은 너무나 유명한 꼬추 아이콘이 된 레오나르도의 스케치

레오나르도의 문서들은 20세기가 되어서야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문서들에 담긴 내용이 호기심 닿는 대로 손댄 개별적 관찰이나 순간 떠오른 생각을 급히 휘갈겨 써 둔 메모에 불과하다는 점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가 역학과 수학 분야에서 남긴 메모들 전부가 그의 독창적 사색의 결과가 아니었다는 사실도 현재 판명되었다. 예술적인 부분과 건축의 일부분을 제외하면 레오나르도의 기술연구에서는 독창성이 떨어진다는 것이 학자들의 야박한 평가다. 그럼에도 탁월한 관찰력과 미대생도 부러워할 데생력 그리고 권위나 거창한 말 보다는 직접 손발로 실험해보는 솔선수범 장인 기질은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다.

레오나르도가 남긴 문서들은 해석하기가 쉽지 않았다. 순간의 단편적인 아이디어들을 적어놓은 데다가 속어인 토스카나어를 좌우 반전시킨 독특한 문자를 사용해 오른쪽으로부터 왼쪽으로 쓰여 있으며 거울로 글자를 반사시켜야 읽을 수 있는 장치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자신만 아는 기호들을 사용하였기에 동시대의 이탈리아인이라 해도 간단히 읽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즉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노트가 널리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레오나르도는 관찰과 생각들을 수많은 메모로 남겼지만 그것들을 잘 정리해서 논문이나 책으로 완성시킨 적은 없다. 원래 레오나르도는 개개의 관찰력에선 무척 뛰어났지만, 이를 일반화하고 체계화하려는 노력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레오나르도의 연구가 자신을 위해서만 이뤄졌을 뿐, 널리 동시대인을 계몽시키려는 목적은 없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는 생전부터 유명하긴 했지만 그가 행했던 과학과 기술의 연구가 동시대에 미친 영향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의 암호 같은 문서들은 후세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특이한 기계 장치들과 멋들어진 스케치, 암호와도 같은 글들은 소설의 소재로서 매우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레오나르도의 종교적 성향도 눈길을 끈다. 그는 ‘최후의 만찬’을 그린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게도 예수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자신의 종교적 성향을 과감하게도 작품에 몰래 표현해 놓았다.

레오나르도가 여러 메세지들을 숨겨놓은 '최후의 만찬'. 그는 세례 요한의 자리를 빼앗은(?) 예수를 싫어했다 

2000년대 등장했던 댄 브라운의 소설 [다 빈치 코드]는 이러한 레오나르도의 특징들을 잘 활용하여 만든 작품이다. 작가의 치밀한 연구와 작품의 개연성으로 인해 일부 고지식한 기독교도들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고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진실인가에 대한 해설서가 책과 영상으로 만들어지기도 하면서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켰다.

영화로도 대박을 친 다빈치 코드

이처럼 레오나르도는 그가 남긴 뛰어난 회화작품들과 데생들로 인해서 흔히 예술가나, 더 넓게는 독특한 기계장치 그림들을 그린 공학자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자연과학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지질학과 화석연구에 있어서도 많은 관찰과 연구를 하였다.

레오나르도가 쓴 것 중 가장 주요한 노트 중 하나로 알려져 있는 [레스터 사본Codex Leicester]은 그가 1506년에서 1510년 사이에 밀라노에서 작성한 72쪽짜리 공책으로 바위, 물, 화석에 대한 스케치와 해부학에 관한 글들로 채워져 있다. 1690년대에 세상에 알려졌으며 1717년에 레스터 경(卿)이 사면서 그의 이름을 따서 [레스터 사본]으로 이름이 불려지게 되었다. 1994년 경매에 등장했을 때 [레스터 사본]에 군침을 흘린 대여섯 개의 유럽 국가들이 가격 경쟁을 벌였다. 하지만 빌 게이츠가 3080만달러(418억원)의 거액을 제시하여 ‘대여섯 개의 유럽 국가들’을 제치고 그 원고를 사들이는 재벌의 위엄을 보였다. 빌 게이츠는 해마다 [레스터 사본]의 전시를 원하는 곳에 대여해 주지만 책의 훼손을 막기 위해 그가 제시하는 까다로운 전시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런던의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은 대여를 신청했다가 조명시설이 미비하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기도 하였다.

국가와 경매를 붙어도 밀리지 않는 돈 많은 빌 형님

[레스터 사본]에서는 댄 브라운의 소설만큼이나 흥미로운 레오나르도의 지구순환 이론을 엿볼 수 있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레스터 사본]에서 드러나는 레오나르도의 지구이론을 그의 에세이에서 자세히 소개하였다. 

이것은 세상에서 제일 비싼 공책!

-2부에서 계속-

by self_fish | 2012/05/11 23:54 | 자료열람실 | 트랙백 | 덧글(4)

육아만감- 많이 먹을거야

육아 월간지 '엄마는 생각쟁이'에서 연재하고 있습니다.

by self_fish | 2012/05/10 01:35 | ▶ 육아만감 | 트랙백 | 덧글(2)

육아만감- 집에서 만들기

육아 월간지 '엄마는 생각쟁이'에서 연재중입니다.

by self_fish | 2012/04/03 15:52 | ▶ 육아만감 | 트랙백 | 덧글(1)

자신감



* <김지윤 저, 고백하기 좋은 날, 포이에마, 2012>에 실린 삽화로 상업적인 용도로의 사용을 금합니다. 

by self_fish | 2012/04/02 18:09 | 비상구 | 트랙백 | 덧글(0)

귀가 트이는 턱 이야기

육상 척추동물의 역사는 수중에서 시작되었다. 물에서 노니는 것에 만족하지 않은 일부 불만쟁이들이 기어이 육지로 올라오면서 지금의 다양한 육상 척추동물로 진화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물에서 땅으로 나와바리를 바꾸기까지 요녀석들은 물 속 하고는 영판 다른 육지생활에 적응해야 했다. 그 중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듣는 문제까지 새로운 환경에 맞춰 바꿔줘야 했다. 
물고기는 내이는 있지만 고막이나 중이 뼈는 없다. 왜냐하면 물의 높은 밀도로 인해 음파의 파동을 옆줄을 통해 직접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육상에서는 물에 비해 턱없이 밀도가 낮은 공기 때문에 소리를 듣기 위해선 다른 것이 필요했다. 특히 압력이 낮은 공기 중의 음파를 고압으로 바꿔야만 했는데 내이의 달팽이관 속에 있는 액체(림프액)가 고압의 파동만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상 척추동물들이 내놓은 해법은 고막으로 소리를 수집한 뒤 여러 개의 뼈들을 거쳐 소리를 전달하는 방법이었다. 포유류의 경우 이렇게 소리를 전달해주는 뼈들을 망치뼈, 모루뼈, 등자뼈라고 한다. 
중이 뼈라고 불리는 이들 뼈는 음파의 압력을 증폭하여 뇌로 전달한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분명 물고기 조상님들은 중이 뼈가 없었는데 그들 후손인 육상 척추동물들은 어디서 갑자기 중이 뼈를 가져온 걸까? 흥미롭게도 중이 뼈들의 기원은 쉽게 연결짓기 어려운 턱뼈가 변환된 것이었다. 이것은 척추동물 최후의 주요 혁신에 해당하는 전이이다.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선 먼저 괴상하게 생긴 칠성장어를 살펴보아야 한다. 현재 턱이 없는 물고기(무악류)인 칠성장어와 먹장어류는 최초의 척추동물이 방산 진화하여 남긴 유물이다. 이 녀석들을 살펴보면 뼈 없는 입 뒤쪽으로 일련의 아가미구멍들이 나있는데 이것은 턱의 진화 과정을 암시해주는 배치다. 최초로 턱이 생긴 어류를 보면, 아가미 뒤에 아가미를 지탱해주는 뼈들이 있다. 이것은 전형적인 척추동물의 위아래 턱뼈와 닮아있다. 
아쉽게도 아가미궁이 앞쪽으로 이동해서 입을 둘러싸는 위치가 된 뒤에 턱뼈로 바뀌었는지, 아니면 턱뼈와 아가미궁은 동일한 발생 체계에서 생겨나기는 해도 서로 무관한 별개의 전문화 현상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아가미 지지대와 턱이 상동구조(같은 원천에서 진화했으므로 형태가 달라도 같은 기관이라는 뜻. 팔과 다리, 손가락과 발가락이 그런 사례)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며 이를 지지하는 증거는 풍부하다.

그림에서처럼 목아래턱뼈는 한때 아가미 지지대였던 것이 턱과 두개를 엮어주는 뼈로 진화한 것이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인지 이것이 하필 내이의 귀연골주머니 바로 옆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뼈라는 구조는 원래의 진화 이유와는 무관하게, 밀도로 인해 소리를 꽤 효율적으로 전달한다. 그래서 목아래턱뼈는 본업으로 턱과 두개를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면서 한편으로 부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두개부가 애초의 유동성을 잃고 두개 뼈들이 굳게 봉합되어 하나의 두개골로 뭉치자 더는 고정 기능을 수행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제 장점을 살려서 전에는 부차적 역할이었던 청각을 본업으로 확장했다. 이것이 현재 포유류의 중이 뼈 중 등자뼈가 된 것이다. 
망치뼈와 모루뼈도 목아래턱뼈 앞의 아가미궁 요소들로서, 초기 척추동물에게서는 턱의 일부가 되었다. 이들은 위턱과 아래턱을 관절로 이어주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현생 양서류와 파충류와 조류에서는 아직도 그 일을 한다. 파충류 위턱의 직사각형 뼈는 포유류에서 모루뼈가 되었고 아래턱의 관절뼈는 망치뼈가 되었다.

어떻게 동물이 제대로 기능하는 생물체로서의 온전함을 유지하면서 한편으로 기관들의 위치와 기능을 바꿔냈을까? 중간 단계의 형태에서는 관절이 맞물리지 않아 턱으로 먹지 못하지 않았을까?
선조 포유류를 생각해보자. 인상뼈-이빨뼈 관절이 벌써 발달했지만 오래된 방형뼈-관절뼈 연결도 여전히 기능한다고 하자. 턱관절이 이중으로 있는 중간 형태인 셈이다. 그러면 이제 방형뼈-관절뼈 관절을 버려도 되니까 그 요소들이 귀로 이동한다. 턱은 새로운 연결 고리가 이미 잘 자리를 잡았으므로 완벽하게 기능하는 것이다.
이런 예는 우리의 선조 집단인 수궁류(獸弓類) 즉 포유상 파충류에 속하는 치노돈트cynodont화석을 보면 오래된 파충류 턱관절에서 방형뼈와 관절뼈가 점차 작아지고 결합이 느슨해지는 경향을 띤다. 한편 아래턱의 이빨뼈는 뒤쪽으로 확장되어 위턱과 맞닿아 있다. 어떤 치노돈트들은 이빨뼈 뒤에 있는 요소인 각하뼈가 방형뼈와 만나서 추가 관절을 이룬다. 마지막으로 고등 치노돈트들 중에서 두세 속은 정말로 포유류와 비슷한 이빨뼈-방형뼈 추가 관절이 있다.
진짜 포유류 중에서도 초기의 녀석들은 망치뼈와 모루뼈가 온전하게 독립한 형태가 아니다. 이 뼈들이 여전히 턱에 붙어 있었고 관절 기능에도 계속 참여했다. 잘 알려진 초기 포유류인 모르가누코돈Morganucodon과 쿠에네오테리움Kuehneotherium이 둘다 그렇다. 쥐라기 후기, 공룡이 세상을 지배하고 포유류의 생은 걸음마 단계였던 시대에 들어서야 이 뼈들이 귀로 들어갔고 이빨뼈-방형뼈 관절 하나만 남았다.

그럼 왜 등자뼈 하나만 있는 귀도 훌륭하게 기능을 수행하는데 나머지 모루뼈와 망치뼈도 생긴 걸까?
반룡dimetrodon은 사실 공룡이 아니라 우리의 먼 선조로서 나중에 포유류로 진화하는 파충류인 수궁류의 조상이다. 반룡의 등자뼈는 위턱과 방형뼈와 가깝게 닿아 있다. 이 연결은 계속 전해졌고, 후대 수궁류에서 때로 강화되는 경우도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수궁류는 포유류의 직접 선조다. 이 해부학적 연결을 볼 때, 포유류 선조의 방형뼈는 주로 턱관절로 기능하면서도 보조적으로나마 소리 전달에 관여했던 게 틀림없다. 

이것은 파충류의 방형뼈가 턱관절의 일부로 기능하면서 소리 전달에 참여한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현대 파충류 중에서도 소리가 방형뼈를 통해 내이로 가는 녀석들이 더러 있기 때문이다. 가령 뱀은 외이나 고막이 없다. 과학자들은 뱀이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한다고 생각해왔는데, 최근의 연구를 통해 녀석들이 몸통으로 소리를 감지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몸통 대부분이 민감하고, 특히 커다란 폐 주변은 진동을 내이로 전달한다. 그런데 땅에 착 붙어 살게 되므로서 유리한 경로가 하나 더 있다. 뱀은 머리를 땅에 대어 진동을 느낌으로써 소리를 듣는다. 진동은 아래턱으로 들어와서 방형뼈로 갔다가 등자뼈로 들어간다. 포유류의 경로와 비슷하다. 게다가 여러 종류의 도마뱀과 뉴질랜드의 투아타라를 대상으로 실험해본 결과, 방형뼈에 직접 진동을 가할 때도 소리가 등자뼈로 잘 전달되어 뇌에 기록되었다.
기관들이 각자 하나의 기능에만 완벽에 가깝게 기능한다면 진화는 정교한 구조를 생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박테리아는 대단한 효율 덩어리다. 절정의 기량을 지닌 단순한 세포로서, 그들 내부에는 프로그램들이 있고 스레기나 찌꺼기 따위는 말끔히 내다버렸으며 필수 유전자들은 하나씩만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박테리아는 생명이 첫 화석 기록을 남긴 35억 년 전 이래 지금까지 죽 박테리아였다. 아마 태양이 폭발하는 날까지 그럴 것이다. 그런 최적성은 경탄을 자아내긴 해도 묵직한 변화의 씨앗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모든 유전자가 저마나 필수적인 작업을 훌륭하게 해낸다면, 어떻게 새 기능이나 추가 기능이 생기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창조성에는 엉성함과 중복이 필요하다.   


* 이 글은 올해 현암사에서 출간한 스티븐 제이 굴드의 에세이집 '여덟 마리 새끼 돼지'에 실린 '귀가 트이는 턱 이야기'를 발췌 편집한 것으로 흥미로운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배경지식이 미천해 그 재미를 느낄 수 없던 것에 분기탱천하여 개인적으로 공부했던 것을 정리한 것입니다.  

* 틀린 부분이 있다면 가열차게 지적해 주세요.


by self_fish | 2012/03/29 01:15 | 자료열람실 | 트랙백 | 덧글(6)

120322


by self_fish | 2012/03/22 14:26 | 비상구 | 트랙백 | 덧글(1)

호모 사이언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카툰은 클릭해서 보세요

보이지 않는 것은 연구할 수 없다. 물론 본다는 말은 마치 3D모델링처럼 360로 회전시켜가며 콧털부터 빤스까지 속속들이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일찍이 물리학자들은 원자를 직접 보지 않고도 원자의 콧털부터 빤스까지 속속들이 밝혀냈으며 블랙홀을 보지 않고도 진공청소기 같은 그의 성격을 알아낼 수 있었다. 즉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의 머리 속에 인식조차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마치 16.5차원에서 거주하는 원주민의 구강에서 서식하는 미생물을 연구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물리학이 원자나 블랙홀, 중력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연구할 수 있었던 것은 수학이란 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학은 우리 머릿 속의 눈이 되어 이러한 존재들을 예측하였다. 물론 수학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그렇다면 수학으로도 볼 수 없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기술의 힘이 필요한 때다.

17세기에 이르러 인류에게는 자연이 기본 옵션으로 장착해 준 눈 말고 새로운 눈이 생겼다. 이 새로운 눈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 낸 기술의 결과물인 망원경과 현미경이다. 이 새로운 눈을 통해 우리는 더 멀리 그리고 더 가까이에 있는 것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현미경은 아직 우리가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아주 작은 생물들의 존재를 볼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현미경은 당신 침대에 요런 녀석들이 살림을 차리고 있다는 유쾌한(?) 사실을 알려주었다

적당한 모양으로 다듬고 광을 낸 유리의 광학적 효과는 이미 16세기에 알려져 있었다. 이 유리의 확대 효과는 확대경과 안경에 쓰였다. 네덜란드 미들부르크에서 안경 제조업을 하던  요하네스 얀센과 그의 아들 차하리아스Zacharias Janssen, 1580~1638는 한 개의 렌즈와 또 다른 렌즈를 결합하는 실험을 하다가 오목 렌즈의 확대 효과가 다른 렌즈를 곁들이면 배로 커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590년경 그들은 최초의 현미경을 제작했다.

얀센 가의 아빠와 아들이 함께 만든 최초의 현미경.
세 개의 관으로 이루어진 두 개의 렌즈로 구성된 현미경으로
접힌 상태에선 3배 정도 확대가 되고 관을 최대로 펴면 10배 정도로 확대된다.


현미경을 이용해 아주 작은 것들의 면면들을 대중에게 널리 알린 사람은 로버트 훅Robert hooke, 1635~1703이었다. 어린 시절 너무 부실한 모습에 일찍 죽을 것이라 생각한 훅의 아빠는 그를 제대로 교육시키지 않았지만 남다른 손재주를 가지고 있던 훅은 집구석에서 여러 가지를 만들고 놀았다. 병약한 아들을 걱정하던 아빠가 오히려 먼저 하늘로 승천하는 바람에 그의 유산을 들고 런던으로 가서 학교를 다닌 훅은 훗날 영국 왕립학회의 맥가이버가 되어 많은 실험도구를 제작하였고 폭넓은 연구를 했다. 그는 1665년 [마이크로그라피아Micrographia]를 통해 달 표면의 분화구부터 바늘, 면도칼, 섬유 견본까지 갖가지 주제에 관해 멋드러진 그림과 함께 폭넓은 통찰을 보여주었다. 이 책은 아주 큰 판형으로 제작되었고 수준 높은 삽화가 아주 큼지막하게 수록되어 있었다. 특히 당시로서는 흔치 않게 읽기 쉬운 영어로 쓰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 수 있었다.  

벼룩의 아름다운 자태가 브로마이드로 실려있는 [마이크로그라피아]
이건 사야되!


[마이크로그라피아]의 첫 장에는 현미경의 제작방법이 실려있다

작은 세계를 대중에게 널리 알린 이가 로버트 훅이라면 진정으로 ‘극미(極微)’라 부를 수 있을 쪼그마한 세계를 탐험한 이는 네덜란드의 안톤 반 레벤후크Anthony van Leeuwenhoek, 1632~1723이다. 그는 정규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열정과 끈기로 미생물의 세계를 탐험한 인물이다. 그의 20, 30대에 관한 기록이 없어 무슨 계기로 현미경 오타쿠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미경을 살 형편조차 되지 않았던 레벤후크는 모든 현미경을 스스로 제작하였고 그의 현미경은 무려 300배까지 확대할 수 있었다. 그는 마흔이라는 뒤늦은 나이에 현미경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고 혈구와 정자, 미생물들을 최초로 관찰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당시로서는 언빌리버블한 90세까지 장수를 누리며 50년 동안 지칠 줄 모르며 연구에 매진하였다.

레벤후크의 현미경은 작은 렌즈 하나를 갈아서 두 개의 금속판에
구멍을 내고 그 구멍에 렌즈를 끼운 것이다. 사용자가 렌즈를
조절해 표본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게끔 금속판에 나사를 설치했다.


그러나 현미경을 통해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바로 과학적인 성과들을 새내기들 오바이트 하듯 쏟아 내지는 못했다. 여기엔 초기 현미경의 기술적인 문제로 인해 한동안 과학적 도구로서의 신뢰를 주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초창기 현미경은 불완전한 렌즈로 인해 광학상의 결함이 있었다. 렌즈 바깥쪽에서 들어온 광선들은 비대칭적으로 휘어져 서로 다른 초점으로 집중됨에 따라 상(像)의 초점이 맞지 않았다. 또한 광선들이 휘어지는 정도가 달랐기 때문에 백색광을 만들어 내는 색들로 서로 다른 정도로 휘어지고, 따라서 색상의 가장자리가 깨끗하게 나오지 못했다. 이러한 현상들을 각각 구면수차와 색수차라고 한다. 특히 둘 이상의 렌즈를 한곳에 집중시키면 색수차는 더 커진다. 이러한 결함들로 이미지의 왜곡과 형태 및 색채의 이상 등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이러한 문제들이 너무 커서 누구도 그들이 본 것의 정확성에 대해 확신하지 못했다.

 

*크라운 유리crown glass
소다-석회를 주성분으로 만든 유리. 빛의 분산이 낮고 굴절률 또한 낮다.

**플린트 유리flint grass
빛의 분산과 굴절률이 큰 광학용 고급 유리. 플린트 유리라는 말은 처음 개발 당시에
 ‘부싯돌flint’을 주 원료로 사용했었던데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부싯돌을 원료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레벤후크는 렌즈를 하나만 사용하였다. 그는 바늘귀만큼 작은 렌즈를 이용하여 수백 배를 확대한 상을 만들면서 왜곡 현상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이처럼 간단한 방법으로 문제점들을 해결한 레벤후크는 복잡한 장치가 전혀 없는 수백 가지의 현미경을 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제작된 현미경은 너무 작고 불편했으며 볼품이 없었다. 그래서 로버트 훅은 복합현미경과 함께 레벤후크와 같은 단렌즈 현미경도 사용했지만 애용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미생물들의 자태보다는 내 눈깔의 안부가 더 걱정되는 레벤후크의 현미경.
그는 이런 열악한 현미경으로 50년간 극미의 세계를 탐험하였다.

이후 망원경과 현미경 같은 광학기구의 개선을 위한 노력은 광학이라는 새로운 연구분야를 탄생시켰고, 19세기 영국 런던의 포도주 상인이었던 조지프 잭슨 리스터Joseph Jackson Lister, 1786~1869(무균술의 창시자인 조지프 리스터의 아버지)에 의해 색수차를 없애주는 색지움 현미경을 발명한 이후 선명한 상을 얻게 되면서 현미경은 연구에 점점 더 많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17세기 현미경의 등장이 바로 과학적 성취로 이어지지 못했던 것은 초창기 현미경의 기술적 결함만이 모든 이유는 아니었다. 17세기에는 무엇보다 현미경이 보여준 것들을 논의 할 수 있는 지적인 틀이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관찰된 상이 무엇이며 예컨대 곤충 해부학, 모세혈관 순환, 태아 발생학에 관해여 무엇을 말해 주는가에 대한 합의는 곧바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로버트 훅은 1663년 코르크의 말라죽은 세포의 세포막을 관찰하고 ‘세포’라는 용어를 탄생시켰지만 세포에 관한 이론은 19세기 테오도어 슈반Theodor Schwann, 1810~1882에 이르러서야 제시되었다. 2천년전 그리스 의학의 영향력에 놓여있던 17세기 의학은 여전히 4체액의 불균형으로 병이 난다는 이론이 병리학을 지배하고 있었다. 인체의 구조와 기능에 대한 지식은 그리스, 로마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레벤후크는 인체에 서식하는 세균을 발견하였지만 누구도 질병과 관련시키지는 않았다. 세균론은 19세기가 될 때까지 의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현미경에 의해 미생물들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났지만 이 생명들이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논의는 자연발생설의 등장과 함께 종교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역시도 19세기에 이르러 파스퇴르라는 천재의 등장을 기다려야 했다.

과학은 기술의 진보를 필요로 한다. 온도의 변화를 측정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다면 열역학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진공을 만드는 기술이 없었다면 진공에 관한 연구 역시 이루어질 수 없다. 마찬가지로 현미경이 없었다면 미생물학 역시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기술이 있다고 해서 과학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가장 근사한 예가 아마도 로마일 것이다. 그리스보다 뛰어난 기술적 발전을 보여준 로마지만 과학적 성과물에 대해선 아무것도 내놓지 못하였다. 16세기에 첫 현미경이 등장했지만 현미경이 뿌린 씨앗이 되어 열매를 맺기 까지는 200년의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어린이 과학월간지 ‘과학쟁이’에서 연재하고 있습니다.

by self_fish | 2012/03/21 14:42 | ▶ 호모 사이언스 | 트랙백 | 덧글(9)

육아만감- 이쁜 짓

* 육아월간지 '엄마는 생각쟁이'에서 연재하고 있습니다.

by self_fish | 2012/03/20 14:27 | ▶ 육아만감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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