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가장 큰 고민거리 카탈루냐

내전 이후, 스페인의 지역 민족주의(regional nationalism)에 대한 문제는 바스크 분리주의자들이 주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최근 사건에서 보듯, 바르셀로나는 마드리드 정부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의 진원지다. 이것은 깊은 역사적 뿌리를 가진 문제다.

2017년 10월, 카탈루냐 수도 바르셀로나와 상대적으로 낮은 인구밀도와 인구 수용률을 가진 마드리드의 스페인 중앙 정부 사이에 수십 년 간 이어져 온 격렬한 싸움은 카탈루냐 독립에 관한 비공식 국민 투표로 이어지는 꼴사나운 광경으로 분출되었다. 40년 전인 1977년 초에 시행된 설문조사에 따르면 카탈루냐인의 단 5%만이 독립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2005년까지 이 숫자고 고작 12%로 증가했다. 2017년 10월 1일의 국민투표에서 9월에 마드리드 정부가 불법이라고 선언한 ‘유권자’의 92%가 카탈루냐 독립 국가에 찬성표를 던졌다.

스페인을 바라보는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최근의 카탈루냐 사건이 완전한 정치적 중요 문제로 갑자기 등장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많은 사람이 바르셀로나를 방문해왔으며, 카탈루냐의 주요한 문화계 인사인 살바도르 달리나 안토니 가우디에게 익숙하다. 유럽의 남부 주변 지역을 괴롭히는 정치적 문제의 역사적 뿌리를 아는 사람은 훨씬 적다. 10월에, 카탈루냐 문제는 새로운 세계적 아젠다로 폭발했다. 어쩌다 여기까지 온 것일까?
카탈루냐 지도, Jan Baptist Vrients, 1608.

중세 후기에 이베리아반도의 북동부 끝자락을 구성하는 지역인 카탈루냐는 스페인 동부와 지중해 및 남부 이탈리아를 통치했던 아라곤 연합 왕국( Crown of Aragon) 핵심 구성지역이었다. 아라곤의 사실상 수도였던 바르셀로나는 지중해의 중요한 권력이었으며 14세기와 15세기는 카탈루냐 문화와 정치적 영향력의 황금시대였다. 페르디난드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1세가 결혼한 후, 1469년 카탈루냐는 아라곤 연합왕국의 일원으로 1474년 카스티야 왕국과 연합했다. 이는 강제적 통합이 아니었다.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관계는 잉글랜드의 웨일스 통합이나 프랑스의 브르타뉴 통합보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과 비슷했다. 15세기 후반 페르디난트와 이사벨라 왕가의 연합은 스페인을 동질적인 문화를 가진 하나의 국가로 만들지 못했다. 카탈루냐 언어는 카탈루냐 문학과 문화적 표현물로써 높은 지위를 누렸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선 카탈루냐를 알아야 했다. 스페인의 ‘황금기’ 동안 카탈루냐는 유럽을 지배했으며, 스페인 대부분을 차지하는 카스티야는 스페인을 지배했다. 왕실은 1561년 카를로스 2세에 의해 마드리드로 옮겨졌다. 이 시점에서 카스티야는 아라곤 인구의 5배를 넘어섰다. 오랜 카탈루냐의 쇠퇴기가 시작됐다. 농민 반란, 전염병 및 귀족들 간의 전쟁이 이어졌다. 이 모든 것이 카탈루냐 경제를 크게 약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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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0년 카탈루냐는 카스티야가 정치의 중심이 되는 것에 반발했다. 같은 기간 포르투갈은 1580년대 이래로 연합에 가입해왔던 스페인과 관계를 단절했다. 그러나 카탈루냐의 저항은 좌절됐다. 1648년 30년 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와 스페인 간의 분쟁은 1659년 피레네 조약(Treaty of the Pyrenees)까지 이어졌다. 그 시점에 스페인은 급속히 쇠퇴했고, 루이 14세 하의 프랑스는 큰 군사력을 지닌 유럽의 지배자였다. 조약의 일환으로 스페인은 카탈루냐 북부 지역을 포함한 프랑스 영토를 잃었다. 이 결과로 카탈루냐 인구의 1/5이 사라졌다. 프랑스 ‘북부 카탈루냐’는 오늘날 많은 카탈루냐인들에게 terra irredenta(회수하지 못한 땅: 역자 주)로 불리고 있는 지역이다.

마드리드의 정치적 중앙집권은 계속되었다. 카탈로니아어는 1677년부터 시작된 다양한 제제로 인해 점차 영향을 받았다. 18세기 중반에 이르러, 카탈로니아어는 공공 영역에서 대부분 사라졌다. 그즈음 1700년에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가 상속자 없이 사망하면서 1701년에 발발한 스페인 계승 전쟁( War of the Spanish Succession)은 스페인의 약점을 명확히 드러냈다. 유럽을 이끄는 두 개의 최고의 군주 세력인 오스트리아가 앞세운 합스부르크 왕가와 프랑스가 앞세운 부르봉 왕가는 이미 1700년 11월 1일에 프랑스가 펠리페 5세를 후보로 선언한 스페인 왕좌를 놓고 자신의 후보를 앉히기 위해 싸웠다.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승리는 아라곤의 다른 영토뿐만 아니라 카탈루냐의 심각한 패배를 상징했다. 이는 스페인이 지역적 차이를 점차 약화하기 위해 프랑스의 중앙집권 전통을 따를 것을 의미했다. 바르셀로나는 포위되고 점령되었다. 1714년 9월 11일 카탈루냐가 정복된 날짜는 18세기 후반 카탈루냐의 국경일인 Diada로 제정되었다. 이 시기 이후로 카탈루냐에 대한 주요 정치적, 경제적 결정은 마드리드에서 이루어졌다.

이후 200년 동안 스페인은 중앙집중식 국가 모델의 시행과 함께 절대적 군주 아래 프랑스의 중앙집권 계획을 면밀하게 따랐다. 프랑스 혁명 이후, 근대 초기 스페인은 더욱더 중앙 집권화를 통해 자신들의 쇠퇴를 막으려고 했다.
1700년 11월 16일 스페인의 왕으로 공식 인정된 펠리페 5세, François Gér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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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반 카탈루냐는 스페인의 나머지 지역과 경제적인 대조를 이뤘다. 카탈루냐 지역은 초기 산업화와 섬유 무역에서의 두드러진 활약으로 스페인 산업의 22%를 차지했다. 반면 마드리드의 기여도는 단지 3%였다. 세기가 진행됨에 따라 바르셀로나는 첨단 산업화 측면에서 마드리드보다는 밀라노와 더 많은 유사점을 지니게 되었다. 유럽의 민족주의 시대였던 19세기 후반, “카탈로니즘(Catalanism)”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문화, 정치적 프로젝트의 등장은 고립과 후진성을 나타냈던 스페인과는 대조적이었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정치적 카탈로니즘의 주요 이론가인 프랏 델 라 리바(Enric Prat de la Riba)는 ‘다른 스페인을 건설하기를 원하는’ 스페인인으로 카탈루냐인들을 묘사했다. 카탈로니스트(Catalanist) 계획은 20세기 초반에 등장했다. 카탈루냐 지역의 산업 권력을 제외하면, 이곳은 카탈루냐 민족주의자들과 자주 충돌했던 무정부주의가 중심이 된 독특한 노동 운동의 존재로 인해 눈에 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바르셀로나는 정치적 폭력과 계급 충돌의 상징이 되었다. 스페인의 어떤 도시도 카탈루냐 지역보다 더 많은 정치적 폭력을 경험하지 않았으며, 스페인 군대와 경찰은 1902년과 1923년 사이에 빈번히 진압에 나섰다.

그러나 카탈루냐 민족주의는 독립을 위한 헌신이 궁극적인 목표인 바스크 지방의 민족주의와는 달랐다. 20세기 초반 10년 동안 Lliga Regionalista(민족주의 연맹)이 카탈루냐 정치의 지배세력이었다. 이것은 스페인의 해체보다는 카탈루냐의 주도권을 추구했던 정치적 운동이었다. 카탈로니아와 북부 이탈리아는 모두 수도 로마와 마드리드의 나태함, 관료주의 및 빈번한 부패에 저항하는 근대화의 힘으로써 자신들을 여겼다. 또한 두 지역은 문맹, 지주제도(landlordism) 및 후진성에 대한 정치적, 문화적 선구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여겼다. 각자 남부 형제들에 대한 기존의 북부 이탈리아와 카탈루냐의 우월감은 여기에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북부 이탈리아와 달리 카탈루냐는 자신들 만의 독특한 언어와 문화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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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스페인은 미국에 군사적 패배를 겪으며 남아있던 해외 영토를 잃었다. ‘조국 스페인’의 취약성은 특히 마드리드 중앙 정부가 ‘내부의 적’을 의식하게 했다. 그중에서도 카탈루냐와 바스크가 두드러졌다. 국가의 해체에 대한 두려움은 스페인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스페인 민족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카탈루냐는 스페인이다. 2017년 10월의 사건에 대한 마드리드 정부의 반응은 분명했다.

스페인의 다양한 개념에 대한 갈등은 1936년에 내전으로 이어졌다. 1939년 프랑코의 승리는 스페인 민족주의의 승리였다. 장기간의 독재 체제를 확립한 프랑코는 스페인 소수 민족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을 모색했다. 내전 중 카탈루냐는 스페인 제2공화국에 헌신했다 (많은 보수파는 실제로 사회 혁명에 대한 두려움에서 프랑코를 지지했다). 카탈루냐의 지역 정체성에 대한 프랑코의 충격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것 이상이었다.
1938 년 3 월 17 일 바르셀로나에 떨어진 이탈리아 군의 공중 폭격.

거의 40년 동안 카탈루냐는 군사 독재 통치를 받았다. 민족운동이 무너질 것은 자명해 보였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카탈루냐 민족주의와 정체성은 휴지기에 들어갔고, 1975년 프랑코의 독재 정권 말기에 내전 이전보다 더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1970년대 중반 스페인이 새로운 민주주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다시 한번 카탈루냐 문제에 직면했다. 반자치제(semi-autonomous system)로 알려진 타협안이 1978년과 1981년 사이에 만들어졌으며 카탈루냐와 다른 16개 지역에 지방 의회가 주어졌다. 동시에, 1978년 새로운 스페인 헌법은 스페인 연합을 영구적인 특징으로써 합법적으로 보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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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코 정권의 유산은 1975년에 끝나지 않았다. 스페인은 프랑코 정권 아래서 경제 현대화를 겪었고, 스페인의 다른 지역들은 카탈루냐와의 경제적, 문화적 차이를 좁혔다. 마드리드는 1980년대에 바르셀로나로부터 문화적 주도권을 차지한 것처럼 보였다. 반면 농업의 중요성은 점점 축소됐다. 카탈루냐는 반봉건적(semi-feudal) 스페인과는 대조적으로 독창적이며 문화적으로 정교하고 산업화한 것을 더 느낄 수 없었다. 특히 1960년대 스페인의 급속한 현대화는 카탈로니즘의 미래 궤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스페인의 카탈루냐 산업의 지배력은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후반까지 지속하였다. 오늘날 스페인 GDP의 18.5 %를 차지하고 있으며 스페인 산업 생산의 26 %를 생산한다. 그 경제적 중요성은 영국 내 스코틀랜드의 경제적 중요성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스코틀랜드의 독립은 영국 경제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카탈루냐의 독립은 스페인엔 재앙이 될 것이다. 1975년 이래로,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의 역할과 지위는 크게 변했다. 바르셀로나의 산업화를 지배한 공무원과 농업 엘리트의 본거지인 스페인 수도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은 더 유지될 수 없다. 그러나 많은 카탈루냐인들은 이베리아반도에서 가장 진보한 사람으로서 그들 스스로 구축하고 부여한 문화적 관점이 남아있다. 프랑코 이후 마드리드의 영광과 바르셀로나의 영향력 감소, 그리고 그와 함께 카탈루냐는 현대의 친 독립운동(pro-independence movement)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카탈루냐 민족주의의 우산 아래서 독립에 대한 열망은 상대적으로 늦게 발전했다. 1930년대 후반과 내전이 시작될 때까지 지역의 산업화로 인해 카탈루냐에서 특히 항상 강세를 보였던 카탈루냐 노동 운동은 무정부주의적 노동조합 운동(anarcho-syndicalism)에 대한 애착으로 유럽에서 유일했다. 인류 역사상 어떤 도시도 바르셀로나 만큼 무정부주의의 지배를 경험한 적이 없다. 무정부주의자들의 운동은 레닌-마르크스주의와 달리 민족주의에 동조하는 이데올로기를 만들려 하지 않았고, 국제주의에 크게 전념했다. 친 독립운동은 노동운동이나 부르주아지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이처럼 독립운동은 파편화되고 약해졌지만, 1970년대에도 그럭저럭 계속되었다. 1980년 최초의 카탈루냐 의회 선거에서 공개적으로 친독립주의 후보자가 선출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공산주의가 종식된 후 혁명 좌파와 독립운동의 연합은 약화하였다. 1990년대에 독립의 개념은 주류 정치 담론 속으로 점점 더 자리를 넓혀갔지만, 단지 수사적인 꿈(rhetorical dream) 이상은 아니었다.

오늘날 카탈루냐 독립을 위한 투쟁은 중산층의 반란으로 여길 수 있다. 중산층에서 급진주의는 거의 등장하지 않지만, 정치적으로 소외당할 때 나타날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것은 정확히 2000년대에 카탈루냐 사회에서 일어난 일이다. 카탈루냐 언어와 정체성을 홍보하는 데 수십 년간 노력해 온  Omnium Cultural와 같은 신중한 조직이 친 독립 활동을 주도하며 '존경받는 반란군’의 등장을 이끌었다. 경제 위기 이전과 이후 모두 카탈루냐 사회의 중산층은 부유한 스페인 지역으로서의 높은 지위가 흔들림을 목격했다. 이것은 카탈루냐 중산층의 정체성에 대한 도전이었다. 2008년 경제 위기의 도래로 카탈루냐인들은 기업은 폐쇄되고 고용 기회는 줄어든 반면, 마드리드에 재정적 지원을 하는 것에 크게 불만을 느끼게 되었다. 이런 경제적 불만은 스페인으로부터 느끼는 소외감을 심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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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대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카탈루냐 문제는 스페인 정치가 직면한 해결하지 못한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였다. 1978년 일부 자치권의 회복과 함께 망명에서 돌아온 카탈루냐 망명 정부의 대통령인 호세프 타라데야스(Josep Tarradellas)은 여러 정권이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에 합의된 해결책을 얻은 것으로 보였다. 1978년의 합의는 2008년의 경제 위기가 무너뜨릴 때까지 대체로 성공했다. 그래서 1970년대 후반부터 2005년경까지 스페인과 민족주의 문제를 보면 거의 항상 바스크 지방과 관련이 있었다. 카탈루냐 문제는 기술적인(technical) 것으로 보였고, 심지어 관심도 없었다. 카탈루냐 교육 시스템과 기타 문제에 관한 분쟁이 있었지만, 외국 언론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Graffiti street art, Figueres, September 2006. Jeremy Sutton-Hibbert / Alamy Stock Photo

1990년대 카탈루냐 민족주의 정치가들과 지식인들 대부분은 새로운 세계화가 전통적인 민족 국가를 무너뜨리고 카탈루냐와 같은 지역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리란 기대에 흥분했다. 이러한 희망이 점차 사라지자 이들은 자치권을 확장하려고 했다. 2006년에 좌파와 우파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포스트 공산주의자(post-communists)로 구성된 카탈루냐의 주요 정당들은 새로운 자치권 법안 초안을 완성했다. 목적은 향후 수십 년간 지방정부 권한의 통합을 허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페인 보수파는 이 문서를 스페인 연합에 대한 위협으로 해석했으며 판결을 내리기 위해 스페인 대법원에 파송되었다. 재판소에서는 이에 대해 자치권 규정에 반한다는 결정을 내리기까지 4년이 걸렸다. 카탈루냐와 스페인이 1930년대 이래 최악의 경제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이 판단은 일을 더욱 꼬이게 만든 것처럼 보였다. 그 판결은 스페인 내에 머물러서는 카탈루냐가 적절한 협상을 얻어내기가 가능하지 않음을 확산시켰다. 2010년 이후 해마다 독립에 대한 지지는 증가했고, 심지어 2013년에는 50% 이상으로 늘었다. 대규모 시위는 2012년 이래로 9월 11일 마다 열렸다. 카탈루냐의 독립은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단일 정치운동이지만, 지역 인구의 절반 이상이 지지하는 여부는 아직 불분명하다. 스페인에서 분리해 나가려는 카탈루냐의 시도와 이를 막으려는 마드리드 정부의 절대적인 결단은 낮은 강도의 충돌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카탈루냐 문제는 스페인의 가장 큰 정치적 문제가 되었다. (번역 김명호)


필자 앤드루 다울링(Andrew Douling)은 카디프 대학교의 카탈루냐 및 스페인 역사학 부교수이자 [카탈루냐 독립의 등장 : 스페인의 영토 위기], (Routledge, 2017)의 저자다.

-출처-
http://www.historytoday.com/andrew-dowling/catalonia-spain’s-biggest-probl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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