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사와 19세기의 정신 질환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에서 정신질환자를 돌보는 일은 힘들었고,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알렉산더 모리슨은 정신병원 보호사들의 건강과 환경을 개선하려고 노력했다.
정신과 의사 알렉산더 모리슨(Alexander Morison)은 1842년에 <정신질환자의 상태를 개선하기 위한 협회(Society for Improving the Conditions of the Insane)>를 창설했다. 이는 1830년대 후반 한웰(Hanwell)지역의 첫 미들섹스 포퍼 루나틱 정신병원에서 드러난 학대, 방치 및 행정적 관리에 대한 충격적인 사건에 따른 대책이었다. 규제가 없는 분야였기에 정신질환자들에 대해 공격적이거나 소홀한 보호사를 제외할 수 있는 조치는 거의 없었다. 모리슨은 보호사의 역할을 전문화하기로 했다. 영국의 대규모 국립 정신병원에서뿐만 아니라 더 작은 사설 정신병원과 배우자, 부모 또는 형제자매들의 통제에 놓이게 되는 가정집에서 그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정신질환 보호사는 이러한 세 유형 모두에서 일했으며 폭력 문제로 한 정신병원에서 해고되어도 다른 병원에서 채용하지 못하게 하거나 환자가 있는 집에서 그들을 고용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모리슨의 협회는 정부 조사관인 정신병원 검사 위원들이 맡아야 했던 유형의 업무에 개입한 극히 이례적인 단체였다. 승인된 보호사에 대한 통합적이며 공식적인 등록부에 대한 요구는 1817년 이래로 주기적으로 있었지만, 1840년대까지 정신질환자의 관리에서 가장 중요한 보호사를 체계적으로 제공하기 위한 어떠한 시도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감독관은 병원에서의 해고와 불성실한 태도에 대해 상세히 기록한 연례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러나 가끔 환자가 중상이나 사망했을 경우에 고발을 권고하는 것 외에는 더 나은 보호사를 제공하거나 그들의 자질을 향상하려는 구조적인 개입은 시도하지 않았다. 이처럼 국가가 강력하게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리슨은 직접 뛰어들었다. 1853년이 되어서야 정신병원 검사 위원들은 환자를 학대나 방치해 해고된 보호사를 목록화하여 관리하는 것을 정신병원의 선택사항이 아닌 의무사항으로 했다.

모리슨은 고향인 에든버러에서 일반 개업의로 수련했다. 그는 ‘정신 의학’을 전문으로 하고 싶었지만, 당시에는 이를 수련할 수 있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1823년 에든버러 대학에 ‘정신 질환’ 과목을 개설해달라고 요청했다. 대학 측은 그가 접촉했던 다른 모든 스코틀랜드 전문 기관들이 그러했듯 이를 거절했다. 모리슨은 런던으로 이주하여 처음엔 한웰 (Hanwell) 그다음엔 왕립 베들렘 병원(Royal Bethlem Hospital)뿐만 아니라 런던 주변의 5~6개의 사립 정신병원의 방문 고문의(consultant physician)로 일하면서 가장 주목할만한 '정신과 의사’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또한 모리슨은 수익성 있는 개인 진료를 했기 때문에 집 안에서나 외출 시 돌볼 수 있는 ‘일인 환자(single patients)’를 위한 신중하고 유능한 보호사가 필요했다.

‘정신질환자’를 돌보는 남녀 보호사들은 무서운 명성을 얻었다. 그 직업은 명령을 따르게 하는 육체적 힘과 능력 이상을 요구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많은 사람이 보호사를 인간의 모습을 한 몽둥이로 보았다. 1895년 말, 간호사 매뉴얼에는 ‘전혀 수련되지 않은 하층민 소녀와 해고된 하인’을 보호사로 채용한 정신병원에 대한 개탄이 적혀있었다. 샬럿 브론테(Charlotte Bronte)의 소설 <에어 제인>에서 그려지는 보호사 그레이스 풀은 당시 보호사가 어떻게 비쳤는지를 보여준다. ‘무뚝뚝하고 딱딱한 표정을 한 그녀에게는 관심을 끌 만한 어떠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라고 제인 에어는 평가했다. 오늘날 잘 알려지지 않은 찰스 리드의 베스트셀러 소설 <현금(Hard Cash, 1863)>에서는 전형적인 여자 주인공들과는 달리 앳된 얼굴을 한 여전사 비셉이란 여성이 등장한다. 그녀는 켄싱턴 하우스 정신병원의 실제 보호사를 기반으로 했으며 남성 환자에 대해 폭력적일 뿐만 아니라 성적인 포식성을 드러낸다.

19세기 시작부터 수갑, 구속복, 족쇄와 엄지손가락을 죄는 기구처럼 물리적인 힘과 기계적인 구속에 대한 지탄과 이를 대신할 수 있는 ‘도덕적 관리(혹은 도덕적 치료)’의 도입에 대한 목소리를 높였다. 정신병원 검사위원들은 가장 폭력적이고 광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육체적인 구속을 근절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이를 위해선 감정의 이입, 호기심, 정중한 태도, 세심하게 대화할 수 있는 능력과 같이 이전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보호사가 필요하다.

간병의 비용

정신병원 운영자를 향한 비난 중 하나는 기계적 구속으로 더 적은 수의 직원으로 병원을 운영할 수 있지만, 구속하지 않은 환자의 도덕적 치료에 대한 임금 청구서는 급증한 것이다. 어쨌든 보호사는 이미 구하기가 어려웠다. 19세기 초 영국에는 약 30개의 사설 정신병원이 있었다. 1840년대 초반에는 130개로 늘었다. 1845년 정신질환법(Lunacy Act) 제정 이후 모든 도시에 새로운 국립 정신병원이 세워졌다.

육체적 힘보다는 강한 인성을 강조한 것은 모리슨이 협회를 설립한 주된 요인 중 하나였다. ‘나이 들고 쇠약해지는 것을 대비한 공제회, 보험, 적절한 지도를 통해 직접 남녀 보호사의 인성을 증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모리슨은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수준의 재정적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으며, 매년 가장 좋은 평가를 받은 남성과 여성 보호사에게 5기니의 상금을 수여했다.

모리슨은 폭력을 행사하는 보호사는 이에 대항하는 환자로 인해 폭력에 노출될 확률이 높다는 것을 인식했다. 왕립 에든버러 의과대학에 있는 그의 풍부한 개인 기록에는 근무 중인 보호사가 입은 부상 목록이 포함되어 있다. 1841년 하웰에서 엘리자베스 윌리엄스 환자는 여성 보호사의 머리를 가격해 쓰러트렸고, 그녀를 목욕시키려는 세 명 이상의 보호사를 입원시켰다. 손으로 작성한 또 다른 목록에는 환자가 부순 가구, 비품 및 옷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법정 산업재해 보상금이 없었기 때문에 모리슨은 ‘정신질환자를 돌보는 훌륭한 보호사를 위한 모리슨 기금’을 만들었다.

자료의 공백을 메우다

모리슨은 인기 있는 데일리 뉴스뿐만 아니라 란셋지와 같은 전문 간행물도 간병인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러한 출판물에 광고를 실으며 캠페인을 시작했다. 모리슨이 남긴 사료에는 버밍험의 듀디스턴 할(Duddeston Hall) 정신병원 전직 보호사인 윌리엄 헌트리지처럼 재정적 지원에 대한 청원이 많았다.

“저는 다가오는 성모 축일(Lady Day, 3월 25일)이면 정신병원에서 고되고 막중한 의무와 책임을 지는 보호사로 종사해 온 지 26년이 됩니다. 저는 곧 은퇴해야 하지만, 그러면 11살과 13살의 자녀를 둔 홀아비로서 연약한 자녀를 보호할 아무런 방도가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제 추천서를 주의 깊게 조사한 후 기금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기를 애원합니다. 그러면 저는 매우 감사히 받아들이고 기도할 것입니다. 1854년 1월 23일 윌리엄 헌트리지.”

이러한 문서는 빅토리아 시대 정신건강 역사의 가장 큰 공백을 메울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일부 지역에서 “잃어버린” 또는 “침묵 된” 것으로 여겨지는 환자의 목소리는 여러 “생존자”의 회고록과 편지 및 청원서 덕분에 상당 부분 회복될 수 있었다. 오히려 잃어버린 것은 정신병원 보호사들의 목소리다. 그것은 빈민에서 귀족에 이르기까지 고통받았던 다양한 사람들을 차분히 진정시키고, 보살피며 통제하는 역할을 맡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모리슨에게 도착한 보호사들의 편지는 이처럼 찾기 힘든 보호사들의 일상생활에 대한 드문 통찰력을 제공한다. 일부 보호사들은 자신의 역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좋은 보호사가 지녀야 할 기술이 무엇인지 대해 숙고한 장문의 글을 보냈다. 런던 북부 이즐링턴 지역의 램버트 윌크스는 1849년 1월에 베들램 정신병원에 관해 썼다.

“선생님. 먼저 저는 공간별로 환자들을 분류할 것을 제안합니다. 좋은 환경과 안락한 삶을 즐기다 온 예민하고 민감한 기질의 남성들은 갑자기 저질스런 사람들과 함께 몰아넣으면 큰 충격과 자괴감에 빠지며, 그들은 매일 고통스러운 장면을 지켜봐야 합니다. 그러니 조용하고, 점잖으며, 예의 바른 환자들은 시끄럽고, 거칠며, 음란한 환자들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둘째, 저는 이 불행한 환자들의 감정을 배려하고 조금이라도 더 친절하게 대한다면 훨씬 빨리 회복될 거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소극적이고 전적으로 무기력해졌기 때문에 질문과 대화 등을 통해 추리력과 정신적 능력을 깨우고 이끌어내는 것으론 충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한마디 말도 없이 온종일, 매일, 매주 한쪽 편에 동상처럼 서 있거나, 다시 올빼미처럼 웅얼거리는 환자를 보았습니다.”

또 다른 편지에선

“보호사는 친절하면서도 목적에 따라선 굳건하며, 환자들의 절망적인 상태와 불행한 상황을 측은히 여겨야 합니다. 그들은 밀튼이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결코 할 수 없고, 다른 이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고 묘사한 맹인과 같습니다. 보호사는 반드시 맑은 정신을 유지해야 합니다. 큰 실수는 종종 술 때문에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미혼 남성보다는 결혼한 남성이 이 직업에 더 적합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가정을 잘 다스린다는 것은 다른 이를 잘 다스릴 가능성도 더 크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자녀들처럼 아버지의 자애로움으로 그들을 더 잘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모리슨은 1807년부터 그가 사망한 1866년까지 매일 일기를 기록했는데, 이는 빅토리아 시대의 정신병 의학자의 일상생활에 대한 독특한 기록을 제공한다. 여기서 우리는 캐번디시 스퀘어 24번지에 위치한 그의 런던 집에서 매달 첫 번째 월요일에 열렸던 정신병원 개선을 위한 협회 모임에 관해 배울 수 있다. 이 모임은 함께 저녁을 먹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며, 생각을 공유하는 전문적 종사자들의 편안한 사교모임으로 이들에게서 보호사의 자선기금을 위한 정기 후원자를 모집했다.

모리슨은 규칙적이고 검소했으며, 술은 전혀 입에 대지 않았고,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일인 환자를 위해 가정방문을 했을 뿐만 아니라 정기적으로 정신병원을 순회했다. 모리슨에게 좋은 보호사를 소개받은 한 환자의 아들은 1845년 그에게 편지를 썼다.

“3년 이상 슬프게 고통받았던 아버지를 책임졌던 듀란트는 그 기간 최대한 예절 바르게 행동하였고, 우리 모두에게 가장 큰 만족을 주었음을 명확히 밝힙니다. 메리본, 불스트로드 가 9번지, 윌리엄 하트.”

(가정 등에서 독자적으로 보호하고 있는)일인 환자는 보호받기가 가장 어려웠다. 비록 정신병원 검사 위원들은 그렇게 구금하고 있는 환자에 대해 모두 통지하기를 요청했지만, 그러한 사례는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믿었다. 검사 위원장인 섀프츠베리 경(Lord Shaftesbury)은 1845년에 일인 환자의 사설 등록부를 만들었지만, 1859년에 이것이 실패했음을 인정했다. ‘우리는 수년간 [그들에 관해]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수백 명의 일인 환자가 있다고 확신한다.’ 단 124명 만이 위원회에 등록되었다.

모리슨은 일인 환자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을 가지고 런던에서 활동하는 소수의 명석한 정신 의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일기에는 세인트존스 우드, 블룸스버리, 베이즈워터와 같은 부유한 지역의 편안한 방에 구금된 이러한 남성과 여성에 관한 간단한 짤막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

“1840년 8월 1일. 다비 양을 진찰했다. 그녀는 나와 함께 소파에 앉아 어머니를 위해 작은 일을 했다. 조용하고 말이 없었지만, 몇 가지 질문에는 예 또는 아니오로 답했다. 그러나 그녀는 어머니에 대해 언급하며 죽었다고 말했다”

1840년 9월 9일. 필라 양은 외설적인 목소리와 극심한 식욕부진에 시달렸다. 유스턴 스퀘어 47번가의 하비 양을 진찰했다. 그녀의 등은 훨씬 호전되었지만, 아직 오른쪽의 근육은 약간 불룩하다. 그녀는 그림을 배우고 있다.

1842년 5월 23일. 트리머씨는 여전히 광기를 보이지만, 맥박은 부드럽고 자연스럽다.

1847년 3월 13일. 볼드윈 씨와 함께 런던에 왔다. 낸시 하람 양이 방문했다. 맥박은 100회로 다소 약했다. 그녀의 손은 기도하는 것처럼 계속 맞잡고 있다.

1847년 3월 31일. 베이스워터의 해리슨 선생을 진찰했다. 그는 광기, 일관성 없는 말, 혼란스러움, 폭력과 낭비벽에 대한 확실한 징후를 보였으며 매우 탈진한 모습이었다.”

또한 모리슨은 해크니에 위치한 ‘닥터 옥슬리의 런던 치료소’와 얼스 코트에 위치한 ‘브래드버리 부인의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여성들을 위한 시설’과 같이 작은 사설 정신병원도 회진했다.

정신질환법을 제정하다

정신질환자의 상태를 개선하기 위한 모리슨 협회는 영국 최초의 정신 질환자 변호 단체인 <미치광이로 몰린 이들을 위한 단체(Alleged Lunatics’ Friend Society)>가 창립된 직후에 등장했다. 이전의 환자들과 지지자들로 구성된, 작지만 적극적이었던 이 단체는 계속 영국 정신질환법을 전복하려 했고, 정신병 의학자와 정신병원 검사 위원을 공격했다. 이 단체의 눈에 비친 그들은 형편없는 보살핌과 폭력적인 병원 관계자들과 싸움에서 실패했으며, 결함이 있는 진단으로 사람을 감금시키는 시스템을 감독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모리슨은 자신의 서류에서 그 단체를 언급하지 않았다. 모리슨의 협회는 그 단체가 정신병원법과 행정관리를 철저히 점검하도록 의회를 설득하는 것을 막는, 극단적인 행동을 취하게 할 가능성이 있었다. 아마도 모리슨은 필연적으로 변화는 불가피하다고 믿었지만, 그것은 이전 환자들이 아닌 정신병 의학자들에 의해 비롯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 단체는 괴팍하지만, 정상인 사람들을 관례처럼 정신 병원에 위탁한 모리슨과 같이 높은 소득을 누리는 정신병 의학자들을 비판했다. 그러나 모리슨의 일기에는 그가 이러한 방식으로 골치 아픈 사람들을 처리하고자 하는 부모, 배우자 또는 형제자매에 대해 그들의 요청을 거부했음을 반복적으로 밝히고 있다. 예를 들어, 1840년 9월 22일. ‘마진 선장이 전화했다. 그는 사우스샘프턴의 백스터와 함깨 자기 아들을 보낼 작정이다. 나는 그의 상태에 대해 조사 위원들에게 설명할 권한이 있다고 말하고, 그의 정신이상 증서에 서명하는 것을 거절했다.’

<미치광이로 몰린 이들을 위한 단체>는 모리슨에게도 마찬가지로 정신병원에서 해고된 보호사가 일인 환자를 정기적으로 돌보게 했다는 혐의를 제기했다. 제임스 크라이튼 브라운 박사는 그가 본 가장 심각한 학대는 가정집에서 보호사에 의해 저질러졌다고 주장했다. 제임스 박사는 가정집에서 로프와 구속복으로 묶어 놓은 환자를 목격했다. 다른 환자는 3개월 동안 어두운 방에 갇혀 있었다. 집에서 정신병원으로 옮겨진 또 다른 환자는 뼈가 부러지고, 머리를 밀고, 타박상과 매질을 당한 흔적이 있었다.

모리슨을 난처하게 만든 한 사건은 자선 활동과 사적인 활동이라는 그의 이중적인 역할 때문에 발생했다. 1852년 여름에 모리슨은 베들렘 병원에서 자신의 사적인 환자의 보호사를 구하기 위해 지위를 남용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보호사 로버트 베이커는 램버스에서 자신의 집과 가까운 곳에 있는 두 명의 개인 환자를 돌본 것으로 베들렘 병원에서 해고되었다. 법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는 정신병원 검사 위원회에 등록하지 않은 작은 정신병원(왜냐하면 환자가 한 명 이상이기 때문이다)을 운영한 것이었다. 모리슨은 베들램 병원에 고문의로 방문하고 있었고, 베이커에게 일인 환자를 데려오라고 부추긴 사람으로 의심받고 있었다. 모리슨은 이러한 일인 환자를 고문의로서 돈을 받고 방문했다. 이 사건을 조사하는 동안 모리슨은 부정직한 지점에 대해 회피하는 말로 일관했다. 자신의 일상생활을 세세하게 기록했던 모리슨은 그가 방문한 환자와 베이커의 환자에 관해 물을 때마다 계속해서 ‘나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베들렘 병원의 형편없는 운영에 대한 조사 위원들의 특별 조사과정에서도 비슷하게 대처했다. 또다시 모리슨은 특히 여성 지하 병동의 비참한 상황과 광범위한 방치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이 보고서에서 ‘방문 의사(visiting physicians)의 역할은 매우 불완전하게 수행되었다. 그들의 정신병원 방문은 너무 형식적이고 피상적이었다. 그들은 밤에 병원을 검열하거나 환자를 살피지 않았다.’고 밝히며 이를 비난했다. ?
모리슨은 수수께끼 같았다. 성실하고, 부지런하며 인도주의로 가득 찬 사람이었지만, 또한 고통과 방치를 외면할 수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존경스럽게도 모리슨은 1843년 아버지를 살해하고 베들렘 병원의 미친 범죄자 수용소에 수감된 예술가 리차드 대드(Richard Dadd)와 따뜻한 유대감을 형성했다. 또한 대드는 모리슨 협회의 편지와 서류 양식을 위한 그림을 그리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정신이 명료했고, 친절했다. 대드는 에든버러 근처 뉴헤이븐의 한적한 집에서 지내던 모리슨에 관해 사람들이 나눈 대화를 기반으로 했을지 모르는 가상의 배경으로 모리슨의 수수께끼 같은 초상화도 그렸다.

돌봄의 문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리슨의 협회는 어려움을 겪었다. <미치광이로 몰린 사람들을 위한 단체>가 발견한 것처럼 정신질환자의 곤경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는 어려웠다. 아마도 간단히 말하자면 그러한 주제는 오랫동안 다루기에는 너무 끔찍했다. 1850년대 중반까지 모리슨의 계획을 위한 자금은 마르기 시작했고, 회원들은 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것에 사과했다 (친구의 방문, ‘지난해 업무로 인해 너무 지쳤다’, ‘복통에 시달리고 있다’ 등을 이유로 들었다). 협회장은 세 번이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1865년 협회는 많이 축소되었고, 그때부터 스코틀랜드의 정신질환 보건에만 전념했다. 모리슨은 은퇴 후 에든버러의 자신의 집으로 프로젝트를 가져갔다. 이 프로젝트는 193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모리슨은 고질적인 저임금과 정식 교육의 부재 또는 보호사의 직업 구조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와 같은 소규모의 협회로는 전체적인 변화를 이끌 힘이 없었다. 정신병원 감시 위원회는 규모와 자금 면에서 충분했지만, 그들은 가부장주의와 가벼운 규제에 동의하는 남성들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1877년 오랫동안 철저하게 이루어졌던 정신질환법 특별위원회는 저임금이 계속되는 한 좋은 직원을 채용하고 유지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불만을 반복해서 들었다.

보호사의 전국 평균 임금은 식비를 포함한 연 30파운드였다. 특별 위원회에서 증인은 최근 여성 보호사의 수준이 크게 올랐다고 언급했지만, 일반적으로 남성 보호사는 선택할 수 있는 저임금 직업의 범위가 더 넓기 때문에 보호사와 같이 고약하고, 위험이 잠재하며, 고용이 불안정한 직업에 지원하는 것을 더 많이 망설일 수 있다고 말했다.

1890년에 영국의 정신 의학자 협회(Medico-Psychological Association)는 더 나은 훈련을 제공하고 전문성을 증진하는 방법을 고려했다. 정신병원 간호사가 되길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수련, 시험, 인증 및 승인 메달이 도입되었다. 여러 국립 지역 정신병원 위원회 또한 자신들 만의 수료 과정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이는 대부분 모리슨의 계획 아래에 지속하였던 스코틀랜드의 시스템과 일치한다. 20세기까지 보호사에 대해 진로와 급여 등급은 완전히 이행되지 못했다.

오늘날 정신보건 산업에서 저임금, 과도한 업무, 자격 없는 보호사에 대한 문제가 다시 돌아왔다. 아마도 우리는 모리슨의 선의에 기반한 계획의 실패와 우리 중 가장 취약한 이들을 위임받은 정신병원 검사 위원들의 수동적인 태도에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 (번역 김명호)

* 사라 와이즈(Sarah Wise)는 시티 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불편한 사람들: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정신병원, 자유와 정신과 의사들](Inconvenient People: Lunacy, Liberty and the Mad-Doctors in Victorian England. Bodley Head, 2012)의 저자다.

* 번역 원문 
https://www.historytoday.com/sarah-wise/finding-keepers-mental-illness-19th-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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