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발명

타인의 마음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는 것, 즉 다른 이의 내적인 삶에 대한 글을 쓴다는 생각은 12세기 영국의 비옥한 혼합 문화(hybrid culture)에서 태어났으며 낭만적인 사랑을 추구하면서 가능해졌다

소설(Fiction)은 12세기 영국에서 발명됐다. 우리는 1150년대의 몇 해를 그 결정적인 순간으로 지적할 수 있다. 12세기 중반의 영국은 지속적이며, 생산적인 접촉을 하는 세 개의 언어가 만들어 내는 다언어 문학 문화(multilingual literary culture)와 이들이 혼재하는 국제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문화는 길고 씁쓸했던 내전이 끝난 직후 등장했다. 승리자의 아들인 헨리 1세는 그의 유일한 합법적 상속자인 딸 마틸다를 남기고 1135년에 사망했고, 그녀의 사촌 스티븐(Stephen of Blois)은 왕위를 찬탈했다. 1153년, 왕 스티븐이 마틸다의 아들 앙리(Henry of Anjou)를 후계자로 지명하면서 마침내 평화를 이루었을 때, 앙리는 엘레오노르(Eleanor of Aquitaine)와 함께하고 있었다. 그녀는 앙리에게 오면서 한 가지를 더 가져왔다. 그건 바로 프랑스 남부에서 기인한 찬양의 서정시와 사랑과 궁정 삶에 관한 음악인 음유시인의 문화였다. 이것은 소설이 뿌리내릴 수 있는 세계였다.
Arthur confronts a giant, from Wace's translation of the History of the Kings of Britain, 12th century.

앵글로색슨 문학은 유독 조숙했다. 서유럽의 나머지 지역에서 거의 독점적으로 라틴어가 쓰였던 반면, 영어를 쓰는 저자들은 라틴어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함께 소통하고 번성하는 속어 문학을 유지, 발전시켰다. 그들은 교회 교부인 성서와 고전, 현대 라틴어 작품을 영어로 번역했다. 그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를 넘어 자유와 독창성을 갖고 창작을 했다. 비할 데 없는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성취를 포함한 역사물, 신학과 철학, 성인의 삶, 설교와 훈계, 영웅과 괴물에 관한 서사시, 상실과 덧없음을 슬퍼하는 시, 법률과 행정 문서를 비롯해 의약, 죄에 대한 적절한 고행, 날씨 예측과 문법과 언어 학습과 같은 다양한 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지침서 등 다양한 저술들을 쏟아냈다. 그러나 이런 작품들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다름 아닌 소설이다. 소설은 특정한 형태의 문학이다. 현대엔 너무나 익숙한 장르이기 때문에, 소설이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영국은 수백 년 동안 소설의 필요성을 분명하게 느끼지 못했던, 번창한 문학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했던 이유(그리고 왜 12세기에 등장했고,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하는지)는 문학 문화가 사회의 내부 구조에 접근할 수 있었던 몇 가지 방법을 통해 드러난다.

나는 정확하고 기술적인 의미에서 ‘소설’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명백히 말하겠다. 소설은 작중의 사건이 실재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을 작가와 독자, 그리고 다른 이들이 인식하고 있는 글쓰기의 한 유형이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 속 인물이나 사건과 매우 비슷한 일이 실제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소설은 작가 자신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며, 그 세계의 모든 규칙을 따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설은 입증할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를 선사하며, 믿음을 강요하지 않고 오로지 그에 관해 생각할 뿐이다. 그것은 작가와 독자 사이의 계약이다. 이러한 자격은 소설과 ‘사실이 아닌’ 문학의 기존 형태인 서사시(epic poetry)와 서정시(lyric poetry)를 구분한다. 또한 서사시와 서정시 양쪽 모두 독자에게 매우 다른 반응을 요구했다. 서사시는 과거와 그 유산의 본질을 포함하며, 필연적으로 진실을 강조함으로써 현재를 위한 신화적 역사를 제공한다. 버질의 아이네이드(Aeneid), 마찬가지로 베오울프(Beowulf)는 허구를 말하지만, 각각은 역사와 이념(ideology)으로서 기능하기 때문에 둘 다 소설은 아니다. 상대적으로 사랑과 충성, 상실을 노래하는 고대 영어로 쓰인 애시(elegies, 哀詩)인 서정시는 소설이 아니다. 시에서 말하고 있는 유일한 목소리는 시가 품고 있는 비통한 진실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작가는 표현된 감정 만을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만약 독자가 이를 믿지 않기로 마음먹으면 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서정시는 잠재적으로 사실이다. 저자는 그가 실제 경험을 묘사하고 있는 지 여부를 알고 있으므로 서정시는 소설이 아니다. 소설은 알 수 없는 것과 관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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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celot and Guinevere kiss in the presence of Galahad and the Lady of Malohaut, Book of Lancelot, 1316.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 여부를 알 수 없다는 것이며 그것은 소설의 가장 중요한 사항이다. 다른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할까?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는 세상은 어떨까? 그것은 소설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완전한 상상의 경험이며 타인의 내적인 삶에 관한 알 수 없는 진실성에 접근하는 것이다. 오늘날 독서의 동기와 그리고 사실 소설에 관한 이러한 명분은 너무나 당연해서 진부하기까지 하다. 그렇기 때문에, 앵글로색슨 영국과 같은 문화는 어떻게 소설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그 답은 개인에 대한 사회의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에 있다. 소설의 등장은 단순히 행동뿐만 아니라 개인의 감정과 내적인 삶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중요하다는 생각에 달려 있다. 이것은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통용되던 생각은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사회적 조건에 달려있다. 앵글로색슨 문학은 개인이란 실제적이고 이론적인 면 모두에서 더 중요한 이상(ideals)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회적 시선을 반영한다. 방어벽 안에 있는 전사는 자신의 군주에 헌신하고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던진 사람이다. 신앙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순교자 혹은 자신을 위해 극기의 삶을 사는 성인, 영주의 땅을 위협하는 거대한 위협에 헌신적으로 용감히 맞서는 영웅. 고대 영시(Old English poetry)에서 개인(individual)이 된다는 것은 이러한 집단적 유대감으로부터 단절됨을 의미한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외적인 행동에서 의미 있게 구분될 수 있는 내적인 삶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전사는 연회장에서의 호언장담대로 행동할 수 있을까? 오직 외적인 행동만이 인간의 가치를 말해줄 뿐, 의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Eve is created from Adam's rib, Souvigny Bible, 12th century. De Agostini Picture Library / Bridgeman Images

나는 사람들이 심리적인 구성에서 어떤 극적인 변화를 겪었다고 제안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사람들이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느끼고 생각했다고 가정할 수만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문학이 드러내는 것은 가치 있었던 문화와 찬양했던 문화 간의 차이다. 앵글로색슨 문화는 백성, 국가, 기독교 신앙과 같은 것을 더 큰 선으로 보았고, 이를 위한 적극적인 자기희생에 가치를 두었다. 그와 같이 앵글로색슨 문학은 개인의 내적인 삶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삶과 역사 속에서 개인은 자신을 위하는 것엔 아무런 가치가 없고, 그들의 생각과 감정은 행동의 결과로서 만큼만 중요했다. 타인의 내적인 삶을 대변하려는 것에 대한 이런 침묵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진실로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전적으로 합리적인 반응이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신은 모든 것을 보며 그의 판단은 완벽하다. 알려질 수 없고, 혹은 신만이 알 수 있는 것을 상상하려는 시도인 소설은 필요하지도 않고, 아쉬울 것도 없다.

소설이 등장하기 위해 영국에선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이러한 유형의 글쓰기를 위한 필요조건은 무엇일까? 후자의 질문은 더 쉽게 나눌 수 있다. 필요하지만, 그러나 충분하진 않은 조건으론 문학 문화의 존재와 그와 일치하는 수준의 경제 발전이다. 이러한 문화에서는 문학 작품을 필요로 하고 지원하는, 혹은 스스로 생산할 수 있는 충분한 교육과 여가를 제공하는 사회에서의 일군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러한 독자층의 발전은 실험적인 활동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작가의 창의력과 높은 수준의 후원이 서로를 격려하기 때문이다. 12세기의 영국은 유럽 전역의 전반적인 경제적 번영(부유한 엘리트 귀족의 점점 더 눈에 띄는 소비와 관련이 많다)과 함께한 것 외에도 이런 부류의 문학 문화가 발전할 수 있는 독특하며 유리한 조건을 마주했다. 영국은 두 개, 보통은 세 개 이상의 언어를 구사하는, 프랑스어를 할 수 있는 귀족층이 있었다. 이러한 1세대, 2세대 그리고 3세대의 이민자들은 앵글로색슨과 앵글로대니쉬(Anglo-Danish) 혈통의 영국에서 자유로이 결혼했고, 영국의 과거와 그 문화를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다. 문학의 후원자로서 그들은 프랑스어로 번역을 요청함으로써 고대 영어 글을 모델로 따랐다. 가장 초기의 프랑스 문학은 영국에서 쓰인 것으로 영국 자료에 기초를 두고 있다. 글은 모든 언어로 쓰였으며 프랑스어와 라틴어와 영어 사이에서 모든 방향으로 번역되었다(이 마지막은 12세기에서 13세기엔 드물었지만, 14세기와 그 이후로 폭발적이며 압도적으로 증가했다). 이 모든 것은 영국의 언어였고, 그들은 영국 문학의 기초를 형성한다.

그러나 문학 문화가 번창했다는 것만으로는 소설이 등장하기에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설의 탄생이라는 연금술에 필요한 또 하나의 요소는 유럽 전체와 서양 교회가 포용한 심오한 본성에 관한 당대의 문화적 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십자군 운동은 세속적인 지배계층에 대한 교회 권위의 위대한 시연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운동에서 기인한 가장 오래 지속한 문화적 영향 중 하나는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것은 세속적이며, 영광스럽고, 폭력적인 삶을 사는 기사는 그런데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전쟁에 나서는 귀족들의 새로운 의식이다. 이러한 생각은 이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영웅뿐만 아니라, 극적인 변화 속에서 이런 기사도의 새로운 이상을 가장 영광스럽게 구현하는 데 성공한 사람들의 가치를 높이고 자신만의 목적을 추구하는 귀족적 삶을 축하하는 문학의 길을 열어주었다.
An illuminated knight from the Hunterian Psalter, c.1170.

한편 파리의 학교에서 피에르 아벨라르(Peter Abelard, 1079~1142: 프랑스의 철학자)와 추종자들은 내면화된 도덕성에 관한 새로운 철학을 연구하고 있었다. 아벨라르에게 죄는 유혹에 빠져 죄를 지으려고 결심하는 순간에 일어나는 죄인의 마음에 놓여 있다. 행동으로 행하는 것 자체는 무의미했다. 폭력적 행동을 육체적으로 자제한 사람은 따라서 그러한 행동을 하려고 한 완전한 의도의 죄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러므로 유혹의 경험 자체는 죄가 아니라 유혹에 대해 행동하려 한 의지의 결정이 죄다. 이것의 의미는 중대하다. 행동은 개인에 대한 판단에서 더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면의 삶, 즉 의지의 움직임이다. 이것은 규칙적인 고백을 정식화하여 일종의 자기반성을 격려했다. 이를 통해 내면의 삶을 탐구하고 새로운 내적 자아를 구현했다. 동시에 기도와 명상에 관한 당시의 영적 관행은 그리스도를 향한 그들의 관심을 돌리게 했다. 십자가에서의 희생은 더는 외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선물로서 이해되기보단, 오히려 그리스도의 자기희생 속에서 무한한 사랑을 표현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것과 함께, 그리스도의 고통과 그의 인간적인 감정, 그리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느꼈을 고통과 기쁨에 깊은 명상적, 공감적 관심을 갖게 되었다. 새로운 감정적 담론은 종교적 글 만큼이나 세속적인 글을 풍성하게 해줄 공감의 어휘를 발전시켰다.

따라서 교회는 신과 영혼의 관계를 중재하는 정서적 경험의 계약인 내면성과 자아(selfhood)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장려했다. 그러나 자아는 개인성(individuality)과 다르다. 내면의 삶이 중요하고 탐구의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타인과 중대하게 다르거나 혹은 타인의 내적 삶을 설명하려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개인성은 단지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위험한 것이다. 루시퍼의 죄는 그 자신의 특이성을 주장한 죄였다. 개인이 되는 것은 반역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소설이 여러 개인의 내적인 삶에 가치를 부여하면서 자리를 잡기 전에 한 단계가 더 필요했다. 퍼즐의 마지막 조각은 중대한 질문에 대한 해답이었다. 무엇이 자신의 권리를 추구하는 개인을 가치 있게 만드는가? 만약 그들이 백성, 군주나 신앙과 같은 더 높은 선에 이바지하지 않거나 존엄이나 구원과 같은 더 높은 목표를 위해 자신의 즉각적인 욕구를 경시하지 않는다면, 또는 그들이 자신의 충족감만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까?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무엇일까?
Visions dreamt by Henry I in Normandy, 1130, an illustration from the Worcester Chronicle, 12th century. Corpus Christi College, Oxford / Bridgeman Images.

우리는 웨이스(Wace)라는 노르만계 시인이 엘레오노르에게 긴 시를 바쳤던 것이 1155년경이라고 알고 있다. 이 시는 제프리(Geoffrey of Monmouth)가 약 1136년에 쓴 <영국 왕들의 역사>에 관한 프랑스 번역본이었다. <영국 왕들의 역사>는 트로이인이었던 브루투스에 의한 설립부터 영국에 대한 앵글로색슨 민족의 궁극적인 승리에 이르기까지 영국 역사를 재해석한 라틴어로 쓰인 장편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영웅은 아서 왕(King Arthur)으로 그의 궁정은 세련됨의 정점이다. 고국에서의 배반이 그를 피비린내 나는 내전으로 내몰고 부하들의 궁극적인 몰락을 초래하기 전까지 아서는 전 유럽의 정복자였다. 웨이스가 제프리의 라틴어 작품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면서 그것의 중요성과 효과를 변화시키는 아서의 화려한 궁전에 대한 묘사를 상세히 설명할 기회를 가졌다. 두 작품에서 아서의 궁전에서 열린 기념행사는 로마 제국으로부터의 전쟁 선포에 의해 갑자기 끝을 맺는다. 제프리의 작품에서 카도르(Cador)라는 이름의 기사는 이것을 영국인들이 무훈으로 명성을 회복할 기회로써 환영한다. 그는 평화로운 시기가 영국을 게으르게 만들었으며, 게으름은 비겁함을 낳았다고 말한다. 이러한 대답에서 초기 영국 문학의 저변에 깔린 가정을 포착할 수 있다. 그것은 개인성을 위한 최고의 목표는 더 큰 대의를 위해 싸우고(문자 그대로 의미 혹은 정신적인 의미로), 필요하다면 그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웨이스가 이 이야기를 번역했을 때, 그는 가웨인이라는 기사의 입을 빌려 답을 했다. 나중에 많은 연애물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가웨인은 카도르에게 평화로운 시기는 좋은 것이고, 영국은 그로 인해 더 나아졌다며 그가 틀렸다고 말한다. 가웨인 계속 말한다.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것은 좋고, 연애도 좋다. 사랑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사들은 기사다운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 주장은 문학에서 소설이 가능해지는 변화의 순간을 상징한다. 그 변화의 열쇠는 사랑에 대한 생각의 새로운 자리와 그리고 새로운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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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개인에게 감정적이며 성적으로 애착을 갖는 것을 의미하는 사랑은 삶에서처럼 문학 안에도 늘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오랜 기간 동안, 그리고 많은 문화권에서 사랑의 표현은 기껏해야 양면적이었다. 고전적 비극에서 사랑은 통제할 수 없는 파괴적인 힘이다. 서정시에서 사랑은 고통을 동반하는 병이다. 서사시에서 사랑은 <베오울프>에서와 같이 무의미하거나, 로마가 건설되기 위해선 반드시 디도(Dido) 여왕을 버려야 하는 <아이네이드>에서처럼 극복해야 할 산만함이다. 사랑은 승화되거나 군주에 대한 사랑 혹은 동료들에 대한 충성심으로 바뀔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사랑은 남성 주인공(언제나 변함없는)을 의무에서 벗어나 자신의 목적인 더 높은 대의로 이끈다. 개략적으로, 사랑은 주군의 딸에게 구혼하는 것처럼 영웅적인 행동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될 수 있다. 주군의 딸을 향한 사랑은 기사로서의 성공과 남자들 사이의 유대의 증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 웨이스의 몇 줄의 글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는 사랑이 영웅적 행동의 목적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자기 충족감이며, 자아실현은 영웅적 행동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낭만적인 사랑은 사랑을 즐기는 당사자들에게만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더 높은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가장 큰 대의는 자신의 행복이다. 그러나 사랑이 이러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이유는 연인에 대한 복종 혹은 고통과 봉사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영웅이 헌신하는 더 높은 대의를 대체하지만, 동시에 이야기의 궁극적인 목표로서 자신의 충족감을 나타낸다.
Lancelot and Guinevere in bed, from the Book of Lancelot of the Lake, French, 1316.

지금, 오로지 지금에야 소설은 가능해졌다. 왜냐하면, 현재의 개인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는 것이 정당하기 때문이다. 자기 충족감을 위한 성취는 서사적 표현(narrative representation)을 제공하는 데 있어 그 자체로 충분하다. 사랑에 대한 플롯은 허구적이다. 최소 두 명의 구별되는 개인의 내적인 삶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작가의 상상력 안에서 그들의 감정적 경험은 그들 자신을 위해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소설이 우리에게 전하는 문학적 패러다임이다. 그것은 그들의 내면적 경험이 외적인 행동만큼이나 중요한 세계를 통해 움직이는, 우리는 알 수 없는 타인의 내적인 삶에 대한 접근이다.

타인의 내적인 삶이 중요하다는 개념을 강조하고, 찬양하고, 믿는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회와 매우 다르다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엔 이러한 발전을 위한 즉각적인 윤리적 측면이 있다. 일단 문학이 타인의 내부와 상호작용하는 개인 자체로서 내부의 표현(반드시 허구적인)에 관여하면, 도덕의 대리상(moral agency)은 새로운 시각으로 나타난다. 신, 혹은 왕에 대한 각 개인의 분리된(그리고 동일한) 책임이라기보다는 한 개인이 다른 개인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지는 문화에서 그것은 타인의 마음이라는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이야기의 확장일 뿐이다. 소설의 윤리적인 영역은 깊고 미묘하다. 그것은 추측적 공감과 경쟁적인 주관성에 대한 비판적 판단의 중요한 사고 실험(thought experiments)의 영역이다. 소설은 진실 주장(truth-claim)을 약화함으로써 객관성을 약화한다. 그리고 이러한 두 측면 모두에서 그것은 우리의 현실 경험에 가장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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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사회에서 소설의 등장은 무엇을 의미할까? 소설은 마술이 아니다. 소설은 세상을 변화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소설은 세상의 변화에 참여하고, 반영하며, 영향을 끼쳤다. 12세기와 13세기에 개인에 대한 새로운 가치화를 보았다면, 그것은 소설이 수많은 새로운 가능성을 취했기 때문이다. 비극은 다시 쓰이기 시작했다. 개인의 자아실현이 그 자체로 가장 높은 목표라면, 개인의 파괴는 새롭고 훨씬 큰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and Yseut: 바그너의 음악극)에선 필사적인 사랑과 비극적인 죽음에 대한 서사적 표현이 등장한다. 그러나 비극은 본질적으로 이 세상의 문제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정의로부터 자신을 분리하고, 그 정의의 힘을 암묵적으로 또는 명시적으로 부인한다. 비극이 쓰일 수 있는 사회에서 실제(reality)에 대한 이해의 범위는 바뀌었다.

마찬가지로, 기사도의 귀족적 이데올로기가 세속적 삶에 가장 큰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 곳은 소설에서였다. 속세의 기사들이 하늘의 호의로 보답받는 거듭되는 장면에서, 낭만적인 사랑은 지배 계급의 새로운 정신적 자기주장의 구현이었다. 이 외에도 개인성을 탐구함에 있어 소설은 영국 사회에서 가장 큰 변화 중 하나에 참여하고 있다. 개인에게 주어진 새로운 가치는 국가 전체에 대한 다른 이해를 포함한다. 그것은 왕이라는 한 인물로 구체화 된 엄격하게 구성된 전체가 아니라, 오히려 각각의 개인들이 자신만의 가치를 가지고 경쟁하는 목소리의 집합이라는 것이다. 이 간단한 생각은 의회와 공적 개념이라는 생각의 기초다. 소설은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현실에 대한 무한한 상상의 공간을 제공한다. 그것은 세상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등장 없이 변화하는 세계를 상상하기란 어렵다. (번역 김명호)

* 글쓴이 로라 애셔(Laura Ashe)는 [영국 초기 소설의 작가들: 먼머스의 제프리에서 초서까지 (the author of Early Fiction in England: From Geoffrey of Monmouth to Chaucer)] (Penguin, 2015)의 저자다.

* 번역 원문
https://www.historytoday.com/laura-ashe/invention-fiction

* 관심가는 내용이어서 번역하긴 했지만, 원문이 너무 어려웠습니다....제가 영문학을 공부한 것도 아니고....틀린 부분 지적해주시면 수정토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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