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5월 23일
부끄러움.
저번 달 C신문사 계열의 출판사에서 어린이 책의 삽화 의뢰가 들어왔다. 그 신문사는 내가 극도로 혐오하는 곳이었다. 평소 술자리에선 만약 내가 유명해져서 그 신문사에서 인터뷰 요청이 오면 보란듯이 내쳐줄거야 라며 호방하게 외치곤 했는데 막상 전화를 받자 난 그러한 호방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못하겠습니다라는 말은 입에서 끝내 떨어지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예금 잔고가 떠올랐다.
미팅 날짜를 잡고 그 출판사로 갔다. 어차피 썩 내키지 않으니까 비싸게 불러서 ‘아님 말구’ 식으로 나가야지 하는 생각이었다. 출판사의 계약조건은 몇몇 부분을 제외한다면 최고였다. 화료는 상당히 높았고 입금 역시 작업 완료 후 15일 이내 입금이었다. 특히 눈길을 끌었던 것은 그 책이 출판이 되고 안되고를 떠나서 무조건 완료후 15일 이내 입금이라는 것이었다. 이 부분이 얼마나 진보적(?)인 조건인지는 디자인이나 일러스트를 한 분이라면 알 것이다. 예전에 비슷한 그림 컷수를 지금 제시한 금액의 절반가격으로 그것도 완료 후 몇 달이 지나서야 받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난 작업을 하기로 하였다.
그 후 계속 번민 속에 있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저 내가 작업하게 되는 책들은 정치색이 없는 아이들을 위한 책이라는 것과 C신문사와 직접적으로 하는 일은 아니라는 것에서 스스로를 수긍시켜갔다.
하지만 이렇게 불편한 마음 때문이었을까. 그림은 잘 풀리지 않았고 샘플 작업들이 오갈수록 편집부가 원하는 스타일과 내 그림 스타일은 맞지 않았다. 결국 어제 전화를 걸어 더 이상 작업 진행이 어렵겠다고 출판사 쪽에 이야기를 전했고 일은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실력이 부족한 것 아닌가 하는 실패의 씁쓸함 속에서 난 작은 안도감을 느꼈다.
세상에는 사람을 죽이고도, 수천억을 빼돌려도 당당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영웅인냥 떠받드는 사람들도 있다. 반면 나는 정당히 일해서 받게 될 그 몇 백에 죄책감을 느꼈야만 했다. 수많은 비리의 온상인 삼성은 여전히 대한민국의 희망이고 전두환은 기념 공원까지 세워졌지만 노무현 전대통령은 비리에 연루된 것이 부끄러워 오늘 세상을 떠났다.
부끄러움을 아는 이들은 하나둘 떠나고 세상은 점점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들로 채워지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패배감이 가슴속을 맴돈다.
# by | 2009/05/23 16:24 | 화장실 | 트랙백(1)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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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예. 사람마다 대처하는 방법들이 있겠지요. ^_^ 저는 그냥 제가 일을 해줌으로서 그 이익이 신문사로 흘러들어가는게 영 께름직 하더라구요. ㅎㅎ 그리고 님 블로그에 들러보았는데 뭐..서로 전혀 다른 분야는 아닌것 같은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