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고라- 히파티아는 과연 꽃처녀였을까? by self_fish

옛날 옛적에 호랑이가 담배 좀 피우던 시절 그리스에서 등장했던 자연철학은 인류 문명사에 있어 매우 이례적인 문화였다.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은 실용적인 목적이나 돈, 명예와 같은 잿밥에 관심을 두지 않고 순수하게 진리를 추구했으며, 국가나 단체의 지원 없이 사적인 모임이나 동아리에 가까운 모임만이 존재했다. 특히 이전까지의 다른 모든 문명에서는 과학자가 익명이었던데 비해 그리스에서는 일종의 개인에게 속한 지적 재산인 듯이 과학자의 이름이 등장했다는 점 등이 눈길을 끈다.

그리스의 자연철학은 훗날 알렉산더 대왕님이 등장해 세계를 한번 크게 휘저어 버리면서 세계 여러 곳으로 퍼져 나가 꽃을 피우지만, 대왕님이 요절하시고 로마가 패권을 쥐면서 결국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과학적 활동은 전반적으로 줄어들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과학적 독창성도 낮아졌으며, 새로운 지식의 발견보다는 옛 지식의 보존 쪽으로 점점 기울어갔다. 이렇게 그리스의 자연철학의 끝물에 등장한 것이 히파티아였다.

[비록 국내에서 개봉할 당시 영화사에서 들이댔던 '스펙터클'하고는 거리가 멀지만, 영화 자체는 수작이다.]

영화[아고라]는 400년대 초 알렉산드리아의 자연철학자 히파티아가 기독교도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했던 실재의 역사적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사건은 잔 다르크 만큼이나 영화화하기에 매우 매력적인 소재였을 것이다. 당시 쇠락해 가던 그리스 자연철학의 마지막 보루인 순결한 꽃처자가 거지 깽깽이 같은 광신도들의 손에 잔혹하게 죽임을 당한다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극적이다. 게다가 하필 그 마지막 보루가 꽃처자라니 이보다 완벽한 비극적인 소재가 어디있단 말인가. 또한 영화는 히파티아를 짝사랑하는 노예 ‘노부스’를 등장시키고, 코페르니쿠스보다 먼저 지동설 을 깨달을 뻔 했다는 가상의 이야기까지 끼워 넣어 로맨스와 학문적 재미까지 손에 거머쥔다. 히파티아 역으로는 레이첼 와이즈를 등장시켜 당시 비극의 현장으로 더욱 몰입케 만들어준다. 따라서 마지막 결말을 보며 모든 남자, 관객들을 분기탱천하게 만드는 영화적 완성도를 이뤄낸다.

하지만 역사적 사건을 영화로 옮기면서 극적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 이것저것 넣고 빼고 가공했을 것은 뻔할 터이다. 좀더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당시 사료들로 추정해보건대 히파티아가 죽임을 당할 즈음의 나이는 50대였을 거라고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아아…… 현기증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미 우리 마음속의 히파티아는 레이첼 와이즈다!]

그럼 영화는 어디까지가 역사적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가공된 것일까?
히파티아가 문학작품에 등장한 것은 18세기 근대유럽에서였다. 이후 예술적으로 승화되면서 엄친딸처럼 언제나 아름답고 젊고 똑똑한 철학자로 그려졌지만 정작 그녀를 이야기해주는 사료는 몇 가지 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 스콜라스티쿠스의 [교회사]나 10세기 비잔틴 사전인 [수다suda], 그녀의 강의를 들었으며 애제자였던 시네시우스의 편지 등과 같은 극히 제한적인 사료만이 있을 뿐이다. 

[히파티아의 애제자였던 키레네의 주교 시네시우스는 영화에서와는 달리 그녀를 배신(?)하지 않았다. 실제론 히파티아가 죽임을 당할 당시 시네시우스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그녀에게 애정과 존경을 표했으며, 그가 히파티아와 제자들에게 보냈던 편지는 현재 히파티아를 밝히는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

그녀는 흔히 주장하듯 370년경이 아니라 355년경에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테온으로, 뛰어난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이며 국립 연구소라 할 수 있는 뮤세이온의 회원이었다. 그 아비의 그 딸답게 수학, 천문학과 더불어 철학에 이르기까지 히파티아는 팔방미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동아리’에서 이러한 학문을 강의했으며, 지배계층과 부유한 자제들, 적잖은 기독교 신자들이 그녀의 강의에 참여했다. 그녀는 지배계층의 존경을 받았고 제국과 도시의 고관들과 부유하고 좋은 혈통, 세력 있는 학생들에 둘러 싸여있었기 때문에 알렉산드리아에서 문화적 측면 만이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으로도 막강한 지위를 점하고 있었다.

385년이 되자 그다지 평판이 좋지 않았던 대주교 테오필루스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직을 맡게 된다. 영화는 바로 이 즈음을 배경으로 시작하는데 테오필루스는 다양한 방법을 통해 이교도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고 결국 이교도의 신전인 세라페움을 공격하여 교회의 손아귀에 넣는다.  

[예부터 행해져 온 기독교의 남의 신전 땅밟기. 이 사건으로 신전 내 세라피스 동상은 물론 수많은 동상이 파괴되었다]

하지만 사실 히파티아는 이 싸움에서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한다. 기독교인이 많았던 알렉산드리아에서 히파티아는 기독교인들에게 호의적이었으며 이교 숭배에 무관심했고 종교적 분쟁이나 논쟁에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그래서 학자들은 그녀와 그녀의 제자들이 당시 세라페움에 있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래서 그러한 사건 후에도 그녀의 활동은 교회로부터 어떠한 제재도 받지 않았다. 하지만 테오필루스의 조카 키릴루스가 그의 계승자로 선출되면서 갈등이 시작된다.

[기독교에서 키릴루스는 성인으로 그려지지만, 동시대 사료에서는 영화와 마찬가지로 무자비하게 권위를 추구한, 충동적이고 권력에 굶주린 인간으로 묘사된다]

그는 영화에서처럼 안식일을 핑계로 유대인을 공격했고, 이에 유대인들은 교회에 불이 났다는 거짓 경보를 내어 기독교인을 공격했다. 격분한 키릴루스는 대규모 군중을 이끌고 도시에서 수많은 유대인을 쫓아낸다. 일련의 사건에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관리였던 오레스테스는 분노했고 키릴루스는 그와 화해를 요청하지만 오레스테스는 거절한다. 그러자 키릴루스는 오레스테스를 압박하기 위해 오백 명의 수사들을 도시로 불러모았고 그 중 암모니우스라는 녀석이 오레스테스의 머리를 짱돌로 내려치는 테러까지 일어난다.

[오레스테스는 영화에서처럼 히파티아의 오랜 제자도 아니었고, 그녀를 짝사랑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도 그와 히파티아는 친분관계에 있었다. 오레스테스가 알렉산드리아에 부임하자마자 히파티아와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은 예전부터 그녀의 명성을 들어왔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암모니우스는 겁대가리 없이 오레스테스의 머리에 돌침(?)을 놨다가 당연히 오레스테스의 손에 죽게 된다]

돌침을 맞긴 했지만, 오레스테스가 키릴루스와 대립각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알렉산드리아에 부임하자마자 돈독하게 지냈던 히파티아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히파티아는 주교의 권위가 제국과 도시의 행정영역까지 확대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고 그녀의 지지에 힘입어 오레스테스는 정당을 만들기에 이른다. 키릴루스는 오레스테스의 당파와 더불어 그 뒤에 있는 히파티아와 그녀의 지지기반을 두려워했다. 오레스테스 역시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그를 지지하는 기독교 세력이 있었고 히파티아의 제자들은 제국과 교회의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키릴루스는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리며 그녀를 마녀로 몰아갔다. 특히 그녀의 지지기반은 부유층이었고 대부분의 빈민은 그녀를 잘 알지 못했다. 키릴루스는 이런 빈민들을 부추겼고 페테르(Prter)라는 행정관리가 폭도들을 이끌고 마차를 타고 있던 히파티아를 잡아 캐사리온 교회에서 옷을 벗기고 깨어진 도자기 조각들로 죽인다. 시체는 도시 밖으로 끌고가 불태워버린다. 그리고 오레스테스는 이 사건에 식겁했는지 이후 종적을 감췄다.

[영화에 등장하는 가상의 인물인 노예 다보스는 히파티아를 짝사랑했다가 '파라볼란'이 되는 인물로 그려진다. 파라볼란은 알렉산드리아의 교회에 고용된 건장한 젊은이들의 단체인데 그들의 임무는 병든 사람이나 불구자 또는 집이 없는 사람들을 모아서 병원이나 교회의 구빈원에 데려다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또한 알렉산드리아 대주교의 군인으로 활동했으며 여러 다양한 장소와 상황에서 대주교의 적들을 공격했다]

키릴루스가 히파티아의 살인을 계획했는지 사료를 통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이 일과 관련이 없다 하더라도 상당 부분을 책임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히파티아를 비방하는 소문을 부추긴 장본인이며 그녀에 대한 편견과 악의를 조장했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사료에서도 키릴루스는 질투심에 사로잡혀있는 위험한 인물로 히파티아의 죽음의 원인이었다고 지적한다.

[찰스 윌리엄 미첼의 히파티아 그림. 문학과 예술작품 속에서 그녀는 항상 아름답게 그려진다]

히파티아는 412~415년에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그녀가 죽었을 당시의 나이는 2, 30대의 꽃처녀가 아닌 약 60세 가량이었을 것으로 보고있다. 이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그녀가 시네시우스의 무한한 존경의 대상이었던 점, 수학과 천문학 철학까지 모두 능통했다는 점, 지배계층의 존경을 받았다는 점 때문이다. 

영화나 많은 문학작품에서는 히파티아의 사건을 종교적 암살고 그리고 있지만, 사실은 정치적 암살로 보아야 한다. 히파티아는 이교도 관습에 관심이 없었고, 종교적으로 중립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인들에게도 많은 존경을 받고 있었고 기독교도 제자들을 보호했다. 그 때문에 키릴루스가 그녀를 이교도라는 핑계로 공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키릴루스 자신도 알렉산드리아에서 이교도를 핍박하진 않았다. 그의 적들은 오히려 기독교 내의 다른 정파들과 이단자들, 유대인들이었다. 히파티아는 그녀가 행했던 이교도의 지식 때문이 아니라 키릴루스의 정치적 행보에 방해되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종교적인 이유로 그녀를 죽였다고 보긴 어렵다. 또한, 히파티아가 죽음으로써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의 자연철학이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죽고 나서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유행하였고 이슬람의 지배하에 들어가기까지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여러 학자가 계속해서 그리스의 수학과 천문학을 연구하였다.

[히파티아의 ‘광장’에서 이교도와 기독교는 함께 공부하며 진리를 탐구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이 말하는 천국이 아니었을까?]

 


뽀나스~ 그녀는 지동설을 알았을까?

[아리스타르코스(Aristarchus of Samos, BC 310~230)는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였으며 알렉산드리아 박물관의 연구원이었다]

영화에서 히파티아는 아리스타르코스가 주장한 이론에 주목한다. 아리스타르코스는 태양을 중심에 놓고, 지구는 자신의 축을 도는 일일 운동과 1년 동안 태양 주위를 도는 운동을 한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이 주장은 당시 고대사회에 대단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왜냐면 지구가 움직이고 있다면 지구 위의 모든 것들은 뒤로 날아가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즉, 감각적 증거에 모순이 되었다. 영화에서도 히파티아는 이러한 점 때문에 고민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또한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을 정면으로 위반하기 때문에 고대 천문학자 중 누구도 그 가설을 수용하지 않았다.

재밌는 건 이 이론을 반대한 여러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시차 문제였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운동한다면 항성들의 시차가 관측되어야 했지만, 그러한 위치 변화는 관측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아리스타르코스는 항성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위치 변화가 관찰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훗날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도 같은 대답을 하였다.

[지구와 항성과의 거리는 무지무지 멀어서 그림에서와 같은 시차의 변화는 눈으로 관찰할 수 없다]

이후 1세기에 활동했던 알렉산드리아 과학자이자 원추곡선을 연구했던 페르가의 아폴로니우스는 지구 중심론을 유지하면서 대안적인 모형을 만들었다. 그게 주전원과 이심원이다. 그리고 히파티아는 이 아폴로니우스의 주석서를 썼다. 주석이라 하면 대단찮게 들리겠지만, 근대 이전에는 창작의 수단으로 쓰였다. 주장을 펼치기 위해 자기 이름으로 책을 펴내기 시작한 것은 근대로 접어든 뒤의 일이었고 그 전까지는 옛 대가들의 책에 주석을 달면서 자신의 의견과 사상을 내비쳤다.

[아폴로니우스의 주전원과 이심원은 이후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로 발전한다]

 즉, 그러한 이유로 아폴로니우스의 주석서를 썼던 그녀가 설령 아리스타르코스의 이론을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의 지동설에 동의했을 거라고 보기는 어렵다. 


-참고 및 발췌- 

마르자 드스지엘스카 저, 이미애 역, [히파티아], 우물이 있는 집, 2002
김태호 저, [아리스토텔레스와 이븐루시드], 김영사, 2007
제임스 E. 맥클렌란 3세, 해럴드 도른 공저, 전대호 역, [과학과 기술로 본 세계사 강의], 모티브, 2006 
버트런트 러셀 저, 서상복 역,[서양 철학사], 을유문화사, 2009

 

 

 


 

 


덧글

  • 잠본이 2011/03/12 19:06 # 답글

    예나 지금이나 정치가 문제로군요 T.T
  • self_fish 2011/03/13 17:39 #

    정치'인'이 문제겠죠? ㅎㅎ
  • 이규훈 2011/03/13 00:43 # 삭제 답글

    올려주세요 ^.^
  • self_fish 2011/03/13 17:39 #

    옙~
  • skybluelov 2011/03/21 21:04 # 삭제 답글

    귀한 자료 퍼갑니다.
    출처:다음 아고라
    주소: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5&articleId=1360416

  • self_fish 2011/03/22 02:16 #

    옙~
  • kiri 2011/05/14 18:34 # 삭제 답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히파티아에 대한 자료들이 많이 남아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정말 아쉽네요
    영화에 나오는 히파티티아의 대사 "만약에.. 비밀을 푼다면.. 아주 조금이라도 정답에 근접한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기꺼이 죽어도 좋아" 라는 말이 기억에 남아요ㅠ
  • self_fish 2011/06/01 13:42 #

    고맙습니다. 저도 그 대사가 인상 깊었습니다. ^^
  • 여공남 2011/05/28 23:07 # 삭제 답글

    소설에 나오는 히파티아의 마지막 대사
    "나는 진리와 결혼했어요.
    배움은 계속 될 거에요.
    여러분은 그 걸 막을 수 없어요..."
  • self_fish 2011/06/01 13:43 #

    멋진 말이에요. 사료에도 그렇게 말했다고 적혀있다는 군요.
  • 후암 2011/06/01 09:35 # 삭제 답글

    과학과 종교가 하나가 될수 없는건 종교인들의 거짓으로인해 귀는닫고 말만한다는 것이죠
    사실을 사실대로 설명하고 증명하면 모하나요 귀는 닫혀있는데
    밤에 아파트 창문을 열고 도시 야경을보면 놀라워요... 보이는 교회 십자가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시대가 바뀌어서 칼과 돌멩이만 없어졌을뿐.... 현실은 과거와 같다고 봅니다
  • self_fish 2011/06/01 13:44 #

    저도 우리나라의 종교가 중세 시대로 회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 2012/02/29 15:40 # 삭제 답글

    히파티아의 사건은 영화나 많은 문학작품들에서 그려지는 종교적 암살 보다는 정치적 암살이었다. 히파티아는 이교도 관습에 관심이 없었고 종교적으로 중립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기독교도인들에게도 많은 존경을 받고 있었고 기독교도 제자들을 보호했다. 때문에 키릴루스는 이교도라는 핑계로 공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키릴루스 자신도 알렉산드리아에서 이교도를 핍박하진 않았다. 오히려 그의 적들은 기독교 내의 다른 정파들과 이단자들, 유태인들이었다. 히파티아는 그녀가 행했던 이교도의 지식 때문이 아니라 키릴루스의 정치적 행보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그래서 종교적인 이유로 그녀를 죽인 것으로 보긴 힘들다. 또한 히파티아가 죽음으로써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의 자연철학이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죽고 나서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유행하였고 이슬람의 지배하에 들어가기 까지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여러 학자들이 계속해서 그리스의 수학과 천문학을 연구하였다.

    =================================================================================================

  • 타키온 2012/04/29 06:55 # 삭제 답글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퍼가도 될까요?
  • self_fish 2012/04/30 15:59 #

    출처만 밝혀주시면 됩니다. ^^
  • iyw2525 2012/10/16 16:57 # 삭제 답글

    글 정말 잘 봤어요
    영화 `아고라`보면서 궁금했던 게 많이 풀려서 좋았어요 ^^
    출처도 밝혀주시니 더 신빙성 있고~_~b!!
    이런 좋은 글 감사합니다 (_ _)
  • self_fish 2012/10/21 11:18 #

    옙~ 고맙습니다~
  • 기번 2013/03/04 22:46 # 삭제 답글

    기독교가 과학이 발전을 막고 저해했다는 말은 사실과 다릅니다.
    서구 과학을 최초로 만든 인물들이 바로 기독교 신부들이었죠. 이성과 신앙은 원래 기독교의 사상에서 나온
    용어입니다.
    안셀무스, 아퀴나스, 스코투스 같은 기독교 학자들은 신앙과 이성은 원래 하나라는 개념에서 출발했고
    여기서 서구 과학의 태동했죠.
    신앙과 이성을 통해서 신의 존재를 입증하고 사변하는 과정을 통해서 서구 과학이 등장한 겁니다.

    신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려고 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뉴튼과 라이프니츠죠.

    최초의 서구 과학자들이 기독교의 성직자였기 때문에 기독교적이 전통에 입각한 서구 과학의 정신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거죠.
  • self_fish 2013/03/05 00:12 #

    이 글 어디에도 기독교가 과학의 발전을 막고 저해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 그리고 이 글을 떠나 기번님의 말에는 저도 대략 동감하며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 기번 2013/03/09 16:44 # 삭제 답글

    self fish님은 어떤 분인지 궁금해 집니다. 서양 사상에 대해 내공이 상당하신 분 같군요.
  • 기번 2013/03/09 16:49 # 삭제 답글

    서구 과학은 중세 유럽의 학자들이 스콜라학을 만들면서 발생했죠. 스콜라학은 기독교 사상을 철학적으로 논증하고 사변하는 학문입니다.

    스콜라학의 등장으로 인해 최초의 서구 과학이 등장했는데도, 한국에서는 많은 분들이 기독교가 과학 발전을 막고 저해했다고 믿고 있죠.

    흔히 갈릴레이의 지동설을 카톨릭 측이 이단시했다는 예를 들면서 그런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기독교적인 스콜라학을 토대로 서구 과학이 탄생했고 발전했다는 사실은 잘 모르더군요.

    어떤 학문과 사상이든 장단점은 있는 법인데, 기독교가 과학 발전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보다 부정적인 측면에 더 주목하는 듯 합니다.
  • self_fish 2013/03/11 09:19 #

    서양 사상에 대해선 그다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지만 과학사에는 관심이 많아서 개인적으로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기번님이 언급하신 부분에 대해선 다행히 제 공부 범위에 있었기 때문에 기번님의 의견에 대해 부족하나마 이해했던 것입니다. ^^;

    비단 한국 뿐만아니라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과학 교양서들에서 이러한 종교vs과학이라는 틀에서 과학사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러한 대립구조가 더 재미있게 읽힐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 때문이겠죠. 또한 중세 자연철학의 토대와 같은 근원적인 문제야 어떻든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과학을 억압하는 모습으로 비춰질 소지가 다분했고 게다가 설상가상 중세 시대 기독교가 저질렀던 악행들은 그런 이미지를 더 굳건히 해주는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기번님 말씀대로 결국 다 장단점이 있기 마련이고 역사의 한 부분에서 그 나름대로의 역할을 한 것이겠지요. ^^
  • 데킬라현 2013/04/12 01:02 # 삭제 답글

    공자도 그런 말을 했는데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때 죽어도 좋다고... 대가의 마음은 같은가 보군요...
  • 은비고 2014/01/17 19:09 # 삭제 답글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출처밝히고 퍼가도될까요??
  • self_fish 2014/01/17 22:52 #

    예~ 괜찮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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