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유산: 종교 반란은 과학을 탄생시켰을까? by self_fish

500년 전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한 사제의 반발은 유럽의 급진전 사고에 불을 붙였다. 이 사건은 과학혁명을 일으켰을까?
“그것은 양심에 어긋나며, 어떤 근거도 없기 때문에 어떤 것도 철회할 수 없으며 철회하지도 않을 것이다. 내가 달리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나는 여기에 서 있으며, 신은 나를 도울 것이다.”

마르틴 루터가 자신을 비난한 자들에게 어떻게 저항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에는 감동적인 무언가가 있다. 그의 지지자들에 따르면, 1521년에 카를 5세가 소집한 보름스 회의(Diet of Worms)에서 자유와 어쩌면 자신의 삶마저 걸려있을 결과를 앞두고 자신을 변호하는 감동적인 말을 천명했다. 시작은 4년 전인 1517년 10월 31일로 지금으로부터 거의 정확하게 500년 전이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루터는 비텐베르크의 시교회 성문에 로마 가톨릭교회의 관행을 비판하는 ‘95개 반박문’을 못 박으면서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다.

인기 있는 역사적 주장에 따르면 루터는 1세기 후에 가톨릭 종교재판에 끌려 나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했던 갈릴레오보다 더 배짱 있는 인물이라고 말한다. 늙고, 고문의 위협에 시달렸던 갈릴레오는 추기경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중얼거림은 이견을 표시한 그의 유일한 한 마디였지만, 아마도 사실은 아닌 듯하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로마의 권위에 대항한 두 가지 도전으로 루터의 종교 개혁과 이후의 과학 혁명을 직접 연결한다. 루터가 지식의 수문을 열었고, 보수적이고 반과학적인 가톨릭 교리에 대한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프로테스탄트가 등장했다. 계몽주의는 루터의 사상을 받아들인 북유럽 국가들에서 뿌리를 내렸던 반면, 남유럽 국가들은 가톨릭의 굴레 아래서 시들어갔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1992년에 이르러서야 갈릴레오가 옳았음을 공식적으로 공표했다.

이건 매력적인 이야기다. 그러나 그게 사실일까?

종교 개혁은 기존의 교회가 참된 믿음의 길을 벗어났다는 루터의 깊은 확신에서 태어났다. 특히 1400년대 후반 보르지아 교황의 악명 높은 통치 기간 동안 교회 내에선 족벌주의가 횡행했고, 사제의 변덕스러운 권위에 따라 구원의 여부가 결정됐으며, 신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라틴어를 읊으면서 그들을 홀렸다. 일부 성직자들은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연옥에 대한 약간의 걱정을 털어낼 수 있는 권리를 가진 “면벌부”를 판매하여 돈을 마련했다.

권위에 도전하다

루터는 구원이란 성직자의 개입 없이 하나님만으로 주어질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의 생각은 권위 있는 인물들에 대해 폭넓은 의문을 갖게 함으로써 일부 프로테스탄트 지식인을 자극한 것으로 보인다고 영국 에든버러 대학교의 과학사학자 존 헨리(John Henry)는 말한다. 그 의문의 대상은 당시 지배적인 세계관의 기반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와 같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자연 철학자들이 포함되었다. “루터는 신자의 성직자화에 대해 이야기하며 모든 사람이 스스로 성경을 읽도록 격려했습니다.”라고 헨리는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또 다른 신의 책’이라 불렀던 자연의 책(book of nature) 또한 스스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종종 “천문학의 루터”라 불렸던 요하네스 케플러와 같은 새로운 신앙의 지지자들과 그의 멘토인 튀코 브라헤는 오랜 믿음에 대한 도전으로 경험적 관찰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종교 개혁은 더 “근대적”이고 진보적이며, 권위와 미신에 덜 사로잡혔던 프로테스탄트적인 유럽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예전부터 여겨왔다. 20세기 초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새로운 프로테스탄트적 자유와 북유럽의 상업경제에서 서구 자본주의의 탄생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성을 그렸다. 종교 개혁이 과학 혁명을 직접 촉발했다는 생각은 미국의 역사학자 로버트 머튼이 1938년에 저술한 책에서 시작한다. 그는 영국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한 줄기인 청교도주의가 아이작 뉴턴, 로버트 보일, 로버트 훅과 런던 왕립협회 동료들의 연구를 육성하는 데 이바지했다고 주장했다. 청교도주의의 금욕주의적 이상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수학과 측정, 순수 이성의 사용에 전념했던 최초의 정량적 과학자(quantitative scientists)의 주장과 편안하게 맞아떨어졌다.

머튼의 논문은 향후 수십 년 동안 광범위하게 논의됐다고 영국 요크 대학교의 과학사학자 데이비드 우튼(David Wootton)은 말한다. “프로테스탄트와 새로운 과학이 어떤 식으로든 불가분하게 얽혀있다는 가정은 여전히 널리 퍼져있습니다.”

그 이야기의 요소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사실이다. 종교개혁 이전의 가톨릭 예배는 그 당시의 성직자조차 분명 미신으로 여길 것투성이였다. 성찬식의 빵은 마법적인 치유력이 있다고 믿었다. 마법사의 주문 “hocus-pocus”은 성찬식에서 사용되었던 가톨릭 라틴어인 ‘hoc est corpus meum(이것은 나의 몸이다)’의 변형일 수 있다.

그러나 이전부터 많은 가톨릭 신학자들은 민간 신앙에 의해 이런 가톨릭 교리가 혼탁해짐을 애석해했고, 또 다른 이들은 종교적 신념과 물질적 세계의 연구 사이에 갈등이 없다고 보았다. 1400년대 후반, 마르실로 피치노(Marsilio Ficino)와 지오반니 피코 델라 미란도라(Giovanni Pico della Mirandola)와 같은 이탈리아 학자들은 이미 지식을 얻는 가장 믿을만한 방법은 고대 텍스트가 아니라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스스로 찾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1500년대 중반까지 의사인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는 현재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인 파두아에서 인간 해부를 함으로써 로마 시대의 그리스 출신 의사인 갈렌에 의해 확립된 해부학에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550년대 나폴리에서는 박식가였던 지암바티스타 델라 포르타(Giambattista della Porta )가 렌즈를 가지고 광학 실험을 시작했고, 갈릴레오 이전에 망원경에 대해 거의 완벽하게 기술하였다. 갈릴레오는 네덜란드에서 망원경이 발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그것으로 천체를 조사하기 위해 제작했다. 1600년대 초반에는 최고의 천문학 연구 중 일부가 가톨릭 예수회에 의해 수행되었다.

가톨릭 교리가 본질적으로 과학을 멈춰 세웠다는 생각은 상당 부분 신화라고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과학 및 종교 사학자인 사치코 쿠스카와(Sachiko Kusukawa)는 말한다. 그녀는 그러한 오해가 “갈등 가설(conflict thesis)”에 의해 커졌다고 생각한다. 이 가설은 19세기에 두 명의 미국인, 교육자 앤드류 딕슨 화이트(Andrew Dickson White)와 화학자 존 윌리엄 드레이퍼(John William Draper)에 의해 형성되었다. 과학과 종교적 신념은 역사상 결코 일치한 적 없는 적대적인 운명이라고 그들은 주장했다. 오늘날에도 갈등 가설은 특히 과학자들 사이에서 몇몇 지지자들이 있다. 예를 들어 진화 생물학자인 제리 코인(Jerry Coyne)은 “만약 로마 무신론이 몰락한 후 서구 세계로 퍼져 나갔다면 과학은 더 이른 시간에 발전했을 것이며, 지금보다 훨씬 더 진보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그건 역사 왜곡이라고 쿠스카와는 말한다. 교회의 박해를 받았던 악명높은 갈릴레오의 이야기조차도 눈에 드러난 것만큼 명명백백하지 않다. 갈릴레오가 옹호했던 태양 중심의 우주론은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1543년에 밝혀졌다. 코페르니쿠스는 현재의 폴란드인 프롬보르크의 가톨릭 사제였다. 코페르니쿠스의 저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는 서기 2세기에 프톨레마이오스가 묘사한 지구 중심의 우주론에 도전했지만, 책이 공개되었을 때 교회는 약간의 이의를 제기했을 뿐이었다. 코페르니쿠스는 당시 교황 파울루스 3세에게 이 책을 헌정했다.

갈릴레오는 끔찍한 괴롭힘을 당했지만, 그가 덜 도발적인 사람이었다면 자신의 태양 중심적 견해를 밝히지 않고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1632년에 발표한 갈릴레오의 『두 개의 주요 우주체계에 대한 대화』에서 오래된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을 변호하는 얼간이는 교황 우르바노 8세를 암시했다.

초기 프로테스탄트는 더 진보적이거나 “과학적”이지 않았다. 루터는 코페르니쿠스의 책이 출판되기 전에 비텐베르크의 다른 학자에게서 그의 이론에 관해 들었으며 그에 대해 다소 낮게 평가했다. 루터는 코페르니쿠스를 “천문학 전체를 뒤집으려고” 애쓰는 바보라고 불렀다. 여호수아가 지구가 아닌 태양에게 멈춰 서라고 명령하는 성경 이야기는 어떨까? 루터에게는 종교적 신앙이 모든 것을 능가했다.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오만이며 신성 모독이었다. 인간은 이해하려고 안 된다. 그냥 믿어야 한다. 이성은 “악마의 창녀”였다.

종교 개혁의 영향을 구분하는 일은 종교 개혁이 결코 단일한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더욱 복잡해진다. 루터가 있던 독일은 작은 왕국과 도시 국가의 집합이었다. 루터의 신념을 많은 부분 공유하던 개별적인 종교 반란이 제네바의 장 칼뱅(Jean Calvin)과 취리히의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의 주도로 1530년대에 스위스에서 일어났다. 같은 시기 10년간 로마 교회로부터 분리해나간 영국은 전혀 다른 기원을 가지고 있다. 헨리 8세는 1529년대에 루터를 비난했지만,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 승낙을 교황이 거부하자 그는 영국 국교회 설립법을 통과시켰다.

이 모든 장소와 움직임에는 그들 자신만의 교리와 정치가 있었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세력은 그들이 싫어하는 급진적인 새로운 생각을 보았다. 가톨릭교회가 그러한 생각들을 더 성공적으로 억압했다면, 그것은 아마도 더 오래, 더 잘 작동하는 검열 장치 때문이었을 것이다. “틀림없이 루터와 칼뱅도 종교 재판과 (금지도서) 색인과 같은 비슷한 규정을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헨리는 말한다.

예를 들어 갈릴레오의 『두 개의 주요 우주체계에 대한 대화』가 프로테스탄트 도시인 암스테르담의 네덜란드 출판 가문 엘지비어(Elzevirs, 엘세비어 출판사의 전신)로 밀반입되었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마찬가지로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는 훌륭한 가톨릭 신자였지만, 갈릴레오의 운명을 보며 불안감을 느꼈다. 데카르트는 성찬식에서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피로 변화시킨다는 화체설을 손상한 물질의 본질에 관한 그의 이단적 사상을 출판하기 전에 프랑스에서 네덜란드로 이주했다.

악마와 깊고 푸른 바다

그러나 비난은 한쪽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혈액이 폐를 통해 심장의 우심실에서 좌심실로 순환한다는 폐순환을 발견한 스페인의 내과의 미카엘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는 가톨릭의 프랑스에서 이교도적인 종교 견해로 인해 투옥되었다. 세르베투스는 감옥에서 탈출해 칼뱅파였던 제네바로 피신했지만, 그는 이전에 교리에 관한 문제로 칼뱅과 심하게 논쟁했던 것으로 화형에 처했다.

그러나 개신교와 가톨릭의 종교적 지도자들의 과격한 개입은 이성과 신념 사이의 근본적인 갈등보다는 세속적인 힘과 권위를 유지하려는 것에 더 가깝다. 두 종교 모두에서 반동적일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 너그러웠던 초기 과학자들(protoscientists)이 있었다. 자연 철학에 관한 일부 차이점은 “실제로는 비교적 사소한 것”이었다고 역사학자이며 작가인 제임스 한남(James Hannam)은 말한다. 코페르니쿠스도, 갈릴레오도, 뉴턴도, 그 누구도 궁극적인 권위가 하나님에 있다는 루터와 교황의 믿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양측 모두 우주가 시계장치처럼 부드럽게 작동하는 하나님의 법칙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신념을 공유했다.

그렇게 해서 근대 과학의 탄생은 종교적 분열과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발전이었다. “과학 혁명은 종교 개혁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진행되었을 것입니다.”라고 우튼은 말한다. 한남도 비슷하게 생각한다. “종교 개혁이 과학의 부상에 어떤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를 다른 영향으로부터 따로 떼어내어 판단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그 영향이란 르네상스였다. 14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고전 문학, 철학 및 예술을 재발견하고 새롭게 구축한 이 운동은 학자들에게 창조에 관한 신의 법칙을 찾고자 하는 자신감을 주었다. 1400년대 중반의 인쇄기 발명은 이런 새로운 아이디어의 신속한 보급을 가능하게 했다.

혹자들은 이전 그림에서 완전히 벗어나 종교 개혁을 쓸 수 있다는 말에 설득당하지 않는다. “16세기의 격렬한 종교적 격동과 이후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분열이 근대 과학의 등장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면 그건 주목할만합니다.” 브리즈번 퀸즐랜드 대학교의 역사학자 피터 해리슨(Peter Harrison)은 말한다. 그러나 아마도 종교적인 요소가 영향을 주었다기보다는 17세기에 과학이 번창하는 데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고 말하는 게 더 낫다.

프로테스탄티즘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추방되었던 인류의 타락으로 도덕적, 인지적, 감각적 능력이 약화하였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반면 루터는 “인류가 타락한 이후로 인간의 이성으로는 자연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렸다. 17세기 영국 국교회는 덜 패배주의적이었다. 그들은 체계적인 과학이 바로잡을 수 있다고 보았다. 현미경과 같은 도구의 도움을 더해 과학은 아담이 누렸던 세계에 대한 이해와 통달의 재발견으로 우리를 이끌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과학적 조사는 세속적이거나 심지어 무신론적인 추구가 아닌 종교적 의무였다. 그것은 하나님이 만든 세상을 이해해야 하는 의무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도 똑같은 견해를 찾을 수 있다. “자연의 책은 오직 한가지 언어로 쓰여 있다”라고 갈릴레오는 썼다. 그것은 “수학의 언어”였다. 그를 비난했던 추기경의 일부는 그의 말에 기꺼이 동의했을 것이다.

그 모든 박해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자연 철학책이 아니라는 갈릴레오의 주장은 그당시 일부를 제외하고는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 진화론과 지구의 나이를 부정하는 오늘날의 종교적 근본주의는 유별난 현대의 착각이다. 그 당시 논쟁은 하나님이 창조한 지구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지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는 최선의 방법, 즉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으냐 보다는 그 믿음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
번역 김명호)

* 마지막 문장의 해석이 안됩니다. 혹시 길 가던 능력자가 계시면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  

* 다른 고마우신 분의 도움으로 마지막 문장을 해결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번역 출처-
https://www.newscientist.com/article/mg23631490-300-luthers-legacy-did-a-religious-revolt-create-sc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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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중생 : 뇌피셜과 갈리아 전기 2018-01-20 21:34:01 #

    ... 사고의 시작은 "지식을 얻는 가장 믿을만한 방법은 고대 텍스트가 아니라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스스로 찾는 것"이라는 생각. (self_fish님의 루터의 유산: 종교 반란은 과학을 탄생시켰을까? 中) -------------------------------------------------------------------------- ... more

덧글

  • 슬픈눈빛 2018/01/14 14:46 # 답글

    Max Weber는 막스 베버가 맞는 것 같습니다
  • self_fish 2018/01/14 17:51 #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하였습니다.
  • 황제 2018/01/15 15:57 # 답글

    진리를 위한 발걸음은 느릴 망정, 절대로 멈추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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