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독증의 역사 by self_fish

그림 출처: 가디언지의 Izhar Cohen 그림

“문자맹(단어를 인식하지 못하는 증상, Word blindness)”은 1세기 전에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1970년까지 의학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96년 11월 7일 영국 의학 저널(British Medical Journal)의 한 페이지에 흥미진진한 작은 기사가 숨어 있었다. ‘뢰트겐 엑스선이 일으킨 피부염’과 벨기에 기후 학회 소식 사이에는 서식스 시포드의 윌리엄 프링글 모건(William Pringle Morgan)의 ‘선천적 문자맹의 사례’라는 짧은 글이 놓여있었다. 뢰트겐의 엑스레이와 마찬가지로 선천적인 문자맹은 가정에도 널리 알려진 개념이 되었지만, 그 이름 그대로는 아니다. 오늘날엔 ‘난독증(dyslexia)’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전체 인구의 약 7~10%가 해당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난독증이 있는 사람들은 단어를 가장 작은 구성요소들로 나눠서 인식하기 때문에 언어를 배우기가 힘들다. 난독증은 유전이며 흔히 체계화, 계산, 집중력을 포함한 다른 분야의 어려움을 동반한다. 현재의 학문적 합의는 난독증을 음운(音韻, 말의 뜻을 구별해 주는 소리의 가장 작은 단위_옮긴 이) 처리의 장애로 정의한다. 주요 학자 중 한 명인 마기 스노우링(Maggie Snowling)은 난독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뇌가 음성 언어의 음운적 특징을 처리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칩니다. 핵심적인 결핍은 음운을 처리하는 것이며 부정확한 음운 표현으로 발생합니다.’

난독증의 역사는 영국 학교 교육의 역사, 그리 유명하지 않은 연구자 및 교육자의 선도적인 업적, 영국 사회에서 성 역할의 변화와 교차한다. 난독증과 교육에 관한 많은 연구는 여성 과학자와 교육 전문가들이 주도했다. 이야기는 빅토리아 시대의 의학과 퍼시(Percy)라는 소년에서 시작된다.

최초의 진단

윌리엄 프링글 모건이 언급한 ‘선천적인 문자맹의 사례’는 잘 성장한 14살의 사내아이 퍼시 F였다:

“밝고 똑똑한 소년이며, 운동능력이 탁월하고 그의 또래에 비교해 열등하지 않습니다. 그가 현재 겪고 있는 가장 큰 어려움은 읽는 법을 배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무능력은 매우 현저하고 뚜렷하게 나타나며, 나는 그것이 선천적인 결함 때문이라고 확신합니다.”

퍼시는 7살 때부터 학교에 다녔거나 개인 교사에게 배웠다. 그들은 ‘퍼시에게 읽기를 가르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고되고 지속적인 훈련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고작 한 음절의 단어조차도 말하기 어려워했다.’

프링글 모건은 난독증을 가진 아동에 대해 동정심 어린 묘사를 했던 최초의 인물이었지만, ‘문자맹’을 가장 처음 인식했던 사람은 아니었다. 최초의 진단은 1870년대 후반 독일인 의사 아돌프 쿠스마울(Adolph Kussmaul)에 의해 이루어졌다. 10년 후 또 다른 독일인인 루돌프 베를린(Rudolph Berlin)은 ‘문자를 습득하기 어렵다’란 그리스어에서 ‘난독증(dyslexia)’란 단어를 만들었다. 영국에서는 프링글 모건이 퍼시에 관한 기사를 발표할 때까지 신경학자인 윌리엄 브로드벤트(William Broadbent)와 안과 의사인 제임스 힌셸우드(James Hinshelwood)가 랜싯(Lancet, 영국의 의학저널_옮긴 이)에서 ‘단어맹과 시각 기억’에 관한 편지를 교환했다. 20세기가 시작되면서 ‘문자맹’은 의학적 의제가 되었다.

왜 이 시기에 문자맹에 대한 관심이 생겼을까? 사람들은 장애를 개인에 속한 ‘성질(belonging)’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우리가 장애를 말하는 방법이다. 즉, 개인이 자신의 신체를 통계적 기준뿐만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도 주어진 무언가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에 장애다. 그러나 ‘장애’에 대한 개념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르며 그래서 그 역사를 추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글을 읽고 쓰는 사회가 출현하기 전에는 난독증이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방식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 난독증의 등장은 프링글 모건과 다른 이들이 문맹 퇴치와 학교 교육의 폭넓은 성장을 포함하여 전문 의료의 확장과 언어 정보를 다룰 수 있는 개인에 대한 수요 증가에 관해 글을 쓰던 당시 서구 사회의 다른 변화들과 일치한다. 그런 다음 난독증이 인식되고, 진단되고, 환자로 받아들여졌다.

현대적 문제가 되다

20세기 초의 난독증에 관한 최고의 이론가는 미국의 사무엘 토레이 오튼(Samuel Torrey Orton)이었다. 뱅고르대학교 난독증 센터의 설립자인 팀 마일스(Tim Miles)는 [초기의 모든 개척자에 관하여]란 책에서 ‘오튼은 난독증을 우리가 현재 발달성 난독증(developmental dyslexia)이라 부르는 것에 포함한 사람입니다’라고 언급한다. 오튼은 ‘문자맹’이라는 용어의 사용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1925년에 ‘거울상 지각장애(strephosymbolia, 반대로 된 문자(b-d, q-p) 사이의 혼동 또는 역방향으로 읽는 경향_옮긴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시각적 어려움을 강조했다. 이로 인해 난독증을 인지적 문제라기보다는 시각적 문제로 바라보는 생각을 강화했다. 또한, 오튼은 시간을 두고 관찰한 결과, 가족 내의 대화와 언어 문제가 난독증과 관련이 있다고 강조했다.

영국에서는 2차 세계 대전의 종전과 난독증을 가진 이들에게 쏟아진 관심의 증가가 일치했다. 급성장하는 전문직업 계급 사이에 글을 읽고 쓰는 기술의 필요성은 특히 중산층에서 자녀의 읽고 쓰기에 대한 어려움에 관심을 갖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초기 ‘문자맹’에 관한 연구는 가장 기초적인 방식으로 난독증 상태를 확인했지만, 지원이나 공식적인 인정은 거의 없었다. 난독증 연구는 아직 초기 단계였다.

1960년대에는 영국에서 난독증 연구에 대한 선구자들이 다수 등장했다. 많은 이들이 런던 블룸스버리의 ‘문자맹센터( Word Blind Centre)’에 모여들었다. 그곳은 1962년에 취약아동을 위한 구호협회(Invalid Children’s Aid Association)에 의해 설립되었다. 센터의 이름은 난독증에 대한 안과의사들의 초창기 설명을 이어받았음을 보여준다. 1972년, 센터의 첫 관리자 중 한 명이었던 산드야 나이두(Sandhya Naidoo)는 [특정한 난독증]이라는 제목으로 센터에서 이루어진 그녀의 기념비적 연구를 출판했다. 이후 이곳은 ‘난독증 아이들을 위한 문자맹 센터’라는 긴 이름을 갖게 되었다.

심리학의 대두

1970년대 초 난독증과 관련한 출판물과 조직이 급증하며 ‘문자맹’이라는 명칭은 곧 사라졌다. 마리온 웰치먼(Marion Welchman)의 부단한 노력으로 1972년에 영국 난독증 협회가 생겼다. 세계적인 연구에서 그러한 조직들은 캠브리지의 올리버 쟁윌(Oliver Zangwill)과 종종 협업했고, 그가 주도하는 심리학 분야는 점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마가렛 뉴턴(Margaret Newton)과 마이크 톰슨(Mike Thomson)은 언어 문제에 관한 교실 기반 테스트인 애스턴 인덱스(Aston Index)를 개발했고,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유타 프리스(Uta Frith)와 그녀의 학생 마기 스노우링은 일련의 심리학 연구를 수행했다. 그들은 난독증 연구의 중요한 이름이 될 것이었다.

심리학 분야의 연구 및 지지와 함께 점점 더 많은 수의 전문 난독증 학교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잭 마이어(Jack Meyer)에 의해 설립된 서머셋의 밀필드(Millfield)는 ‘문자맹’을 앓고 있는 학생들을 돕는 데 있어 최초로 명성을 얻었다. 영국 총리 클레멘트 아틀리(Clement Attlee)의 아들 마틴 아틀리(Martin Attlee)는 그곳에서 가장 유명한 ‘문자맹’ 학생이었다. 그러나 총리가 공부했던 1940년대에는 읽기와 쓰기를 어려워하는 학생을 지원하는 학교가 거의 없었다. 상황은 1960년대 이후로 바뀌었다. 많은 헌신적인 학교가 설립되었고 여러 곳에서 난독증과가 설립되었다. 난독증 아동을 위한 교육을 제공하는 데 앞장선 것은 사립 학교였다.

중산층 신화

기금은 전문학교 설립에 있어 가장 큰 도전이었다. 말하기와 언어 치료사였던 다프네 해밀턴 페어리(Daphne Hamilton-Fairley)는 런던에서 난독증 아동과 마주다. 1970년대 후반, 그녀의 치료에 함께 했던 아이들의 부모는 전문 수업의 필요성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전문학교를 설립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힘을 합쳤다. 파크 레인의 인터컨티넨셜 호텔에서 개최된 ‘The First Annual Spell Ball’에서는 50,000파운드 이상의 기금을 모았다. 1982년에 페어리 하우스 스쿨(Fairley House School)이 켄싱턴의 프린스 게이트에서 처음으로 아이들을 위해 문을 열었다. ‘그것은 부모의 힘이란 관점에서 볼 때 마술이었으며, 아이들을 위해 싸우는 방법이었습니다.’라고 해밀턴 페어리는 회상한다.

난독증에 대한 개인 평가와 사립학교의 연계는 자녀의 학습 장애를 설명하기 위해 부유한 부모들이 지어냈던 ‘중산층 신화’로서의 난독증 개념에 관한 기원을 일부 설명한다. 가장 초기에 전문학교를 준비하는 일에는 자녀의 교육적 성취에 특별히 관심을 두고 있으며 시간과 돈 모두에서 여유가 있는 부모들이 주도하였다. 가장 초창기의 많은 전문학교들은 일부 지방공공단체의 학생들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대부분 학비와 학부모가 모금한 기금에 크게 의존했다. 그러한 전적으로 인해 난독증은 개념이 불확실하고, 높은 사회경제계층의 아이들에게만 유독 더 많이 진단되는 것을 비난하는 이들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었다.
또한, ‘총명하고 똑똑한’ 퍼시와 같이 가장 초창기의 진단 기준 중 하나는 ‘불일치 모델(discrepancy model)’에 기반을 두었다. 이는 난독증이 있는 아이의 아이큐를 측정하였을 때 독서와 철자법의 어려움을 제외하고는 다른 점은 손상되지 않았고, 평균이나 그 이상의 지능을 가졌다고 진단하는 것을 말한다. 현재 난독증은 다른 능력 전반에 걸쳐 영향을 나타내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초기 진단모델은 아마도 부모에게 특히 매력적이었다.

블룸즈베리에서 켄싱턴까지 사립학교들뿐만 아니라 난독증을 고려했던 공간들은 더욱더 특권적인 환경으로 채워졌다. 이는 자녀의 교육을 지원하는 데 있어 부유한 부모의 능력이 반영된 것이기 때문에 놀랄만한 형국은 아니었지만, 그 후로도 계속 이어지며 난독증은 특정 계급과 결부되어 버렸다.

여성의 참여

난독증의 역사는 이런 사회 계급의 교차점에 더해, 20세기 전반에 걸쳐 성 평등을 향한 점진적인 진보라는 더 넓은 사회적 변화를 반영한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과 독일에서 문자맹의 식별은 남성 전문가에 의해 일률적으로 수행되었다. 난독증은 특히 남성에게 영향을 끼치는 듯했는데 왜냐하면 아버지의 전문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교육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젊은 여성들은 읽고 쓰는 능력이 얼마나 가능한지를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었고, 따라서 그런 능력이 얼마나 지체될 수 있는지를 파악하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여성의 활동이 두드러졌고, 많은 경우 난독증 연구 및 교육을 이끌었다. 활동하는 여성의 다수가 난독증 아동의 어머니이거나 자신이 난독증을 갖고 있었고, 이런 상황은 자기 일에 특별한 자극을 주었다.

난독증의 대모 격인 베베 혼스비(Beve Hornsby)는 2차 세계 대전 중 구급차를 운전한 발레 선생이자 사교춤 강사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인생 후반에 그녀는 언어 치료사가 되었고, 난독증을 앓는 아이들을 만난 후 1971년 런던 성 바르톨로뮤 병원의 심리의학과에 난독증 클리닉을 설치했다. 3년 후 혼스비는 그녀의 동료인 프룰라 쉐어(Frula Shear)와 함께 [하나부터 열(Alpha to Omega)]이라는 핸드북을 출판했다. 독서, 작문, 철자법을 가르치기 위해 매우 정교하게 다중감각적으로 접근하는 이 책은 오늘날에도 계속 사용되고 있다.

이 당시, 이런 여성들의 명성으로 난독증 연구, 교육, 이해는 보살핌, 정서적 참여와 가끔 임기응변까지 포함해 특별한 조화를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여성 개척자 중 상당수는 전문직에 대한 불평등한 접근을 비롯해 그 당시 확고했던 성 역할(gender norms)을 벗어나 활동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훗날 뱅고르의 난독증 센터 책임자가 된 앤 쿠크(Ann Cooke)는 여성 노동력에 대한 의존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1970년대에) 우리가 시작했을 때 이 일은 할 일은 없지만, 아이의 발달을 돕는데 상당한 관심을 가진 부인들의 문제였습니다. 우리의 활동은 그녀들에게 자신감을 주었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가르치고 있던 것은 단순히 언어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 말경에 음운 부호화(phonological coding)의 결핍으로서 난독증 개념은 확고해졌고, 이 학문 분야는 미국인 프랭크 벨루티노(Frank Vellutino)의 연구인 [난독증의 이론과 연구(Dyslexia: Theory and Research, 1979)]에 의해 어느 정도 통일되었다. 이는 부적절하다고 밝혀졌으며 난독증이 시각적 문제라는 초창기 이론을 거부했다. 그 대신에 난독증은 특정한 신경생물학적 문제로 받아들여졌는데, 난독증은 태어날 때부터 나타나서 아이들이 문자 언어의 ‘코드’를 완벽히 해석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난독증은 남자아이에게서 더 일반적이지만, 여자아이에게서도 상당 부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난독증을 둘러싸고 점차 합의에 도달해가는 와중에도 영국 정부의 반응은 느리기만 했다. 난독증이 의회 회의록에 가장 처음 등장한 것은 1962년 2월 22일이었다. 헨리 브레위스 MP(Henry Brewis MP)는 교육부 장관에게 ‘난독증이나 문자맹을 겪고 있는 아동의 교육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는 특수시설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대답은 전형적이며 모호했다. ‘의견은 이 장애의 본질에 따라 다르며, 우리 의료 담당자 중 한 명이 난독증을 겪고 있다고 말한 수 백 명의 어린이들에 대해 개별적인 검사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남은 10년 동안 의회 질문에서는 난독증에 대해 산발적인 언급만 있었다.

성장통

난독증을 법적으로 인정받으려는 최초의 시도는 1970년대에 있었다. 난독증은 만성병 및 장애인 법(Chronically Sick and Disabled Persons Act)의 조항에서 짧게 언급되었다. 뒤이어 특정 읽기 장애가 있는 아동에 대한 티자드 보고서(Tizard Report)에선 ‘우리는 특정한 근본 원인과 증상을 가진 발달성 난독증 증후군을 인식했다는 견해에 매우 회의적입니다.’라고 결론 내렸다.

1978년에 특수 교육의 필요성에 관한 워녹 보고서(Warnock Report)가 발표되었다. 이 보고서에 실려있는 당시 교육과학부 장관인 마거릿 대처에 의해 발표된 위원회 결과는 ‘신체적 또는 정신적 장애가 있는 아동과 청소년을 위해 교육 조항을 검토하는 것’이었다. 학습의 어려움에 관해 정부의 인식이 획기적으로 전환되었다고 널리 평가받는 이 보고서는 정책에서 몇 가지 변화를 권고했다. 그중에는 ‘특수 교육의 필요성(special educational needs)’이라는 용어뿐만 아니라, 학습 장애가 있는 어떤 아동이나 학부모라도 이용할 수 있도록 지방 정부의 협의를 공식적으로 작성한 ‘성명서(statementing)’가 있었다. 그러나 눈에 띄는 점은 그 보고서에 난독증이 빠져있다는 것이다.

워녹 보고서에서 난독증이 제외된 이유는 무엇일까? 메리 워녹(Mary Warnock) 자신은 난독증을 해결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음에도 교육과학부서 내에서 난독증이란 용어에 보이는 적대감은 컸다고 진술했다. 구체적으론 한 고위 공무원이 그녀를 불러 그 보고서의 ‘권한(terms of reference)’에 대해 상기시켰다고 회상했다. 워녹은 그가 ‘난독증이라 불리는 학습장애에 대한 특정 분류가 있다고 제시해서는 안 된다’고 했던 말을 기억했다. 교육과학부서의 그러한 반응은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시간과 자원 면에서 비용이 많이 드는 문제에 대해 해결하려는 의지가 결여되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너무 오랫동안 난독증을 인정하기 꺼린 정부는 난독증 아동이란 배움이 느리거나 태만한 것이라는 잘못된 신화가 뿌리내리는 데 기여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제니스 에드워즈(Janice Edwards)는 [난독증 현황( The Scars of Dyslexia, 1994)]이라는 그녀의 연구에서 난독증 아동에 대한 부족한 준비가 어떻게 공립학교와 사립 학교 모두에서 비참한 학교 교육으로 아동들을 이끌었는지를 추적했다. 난독증 학생을 위한 특수 학교인 이스트 코트(East Court)의 설립자 중 한 명인 빌 왓킨스(Bill Watkins)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학교를 찾은 이들 중 일부는 사립학교나 예비학교에서의 경험으로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매우 작았던 한 어린아이는 학교 선생님이 교실에서 내동댕이쳤습니다.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맸습니다.”

정부는 워녹 보고서를 발표한 직후 ‘특정 학습 장애’란 포괄적 용어로는 구분하여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난독증 자체의 문제에 관해선 답할 수 없다고 했다. 최초로 명시적인 승인은 1987년에 있었다. 정부는 (다소 모순적이지만) 교육과학부와 그 장관이 난독증을 문제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그릇된 신화’를 불식시키기 바란다고 언급했다. 사실 ‘정부가 난독증과 난독증 아동의 지속적인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장기적인 복지와 성인이 되었을 때 성공적으로 사회의 구성원으로 기능하려면 조기에 난독증을 인식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한다. 난독증에 대한 평가가 완료되면 적절한 치료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계속되었다.

루돌프 베를린에 의해 처음 이 용어가 사용된 지 130년이 지난 오늘날, 난독증은 인정되고 있다. 2008년 노동당 정부는 현재 교육발전재단(Education Development Trust)의 대표인 짐 로스(Jim Rose)에게 난독증 아동의 교육여건을 개선하기 위한 방법을 조사하도록 요청했다. 이것은 같은 정부에서 2005년에 작성한 아동 계획(The Children’s Plan)에서 비롯되었다. 2009년 로스의 보고서는 난독증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정확하고 유창한 단어 읽기 및 맞춤법과 관련한 능력에 주로 영향을 미치는 학습 장애. 난독증의 특징은 음운 인식, 언어 기억 및 언어 처리 속도에서의 어려움이다. 난독증은 지적 능력의 범위에서 발생한다. 난독증은 구분 점이 명확하지 않고, 범주(category)가 뚜렷하지 않으며, 연속적인 것(continuum)으로서 생각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지속적인 지원

오늘날의 난독증 학생은 필요한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운동가들은 현 상태에 안주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모든 학교는 난독증을 인식하고, 특수 교육 요구 및 장애 규약(Special Educational Needs and Disability Code of Practice)을 기반으로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 2010년의 평등법(Equality Act)은 직장에서 법적 보호를 제공했다. 영국 난독증 협회, 난독증 행동(Dyslexia Action), 헬렌 아르켈 센터(Helen Arkell Centre)와 같은 조직의 지속적인 활동은 난독증에 대한 인식을 증진하고 어린이, 학부모, 교사에게 도움을 제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난독증 논쟁의 반대편에는 여전히 비방하는 이들이 있다. 특히 ‘중산층 신화’로서 난독증 개념은 퇴색했지만, 정확한 정의와 다른 유형의 언어적 문제와의 차이점, 용어로서의 유지 가능성에 대한 학술적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어떤 의학적 진단과 마찬가지로, 난독증은 명확한 경계로 분류할 수 없으며, 정의는 안정적이지 않다. 그러나 난독증이라는 용어와 그것이 음운의 연관성과 관련 있다는 합의는 어느 것도 바꿀 수 없다.

퍼시 이후로 난독증에 대한 이해는 먼 길을 돌아왔다. 난독증의 역사는 사회가 그러한 차이를 ‘적절한’ 기능에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할 때조차도 사람들 사이의 미묘한 차이가 그것을 정의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한 통찰을 제공한다. 또한, 장애인의 권리를 더 광범위하게 옹호하는 난독증 활동가가 초기에 일부 전문적 교육을 제공하는 사립학교의 역할과 정부의 비타협적인 상황에서 난독증 용어를 인식시키는데 직면했던 어려움을 보여준다.

또한, 실독증 교육, 지지 및 연구에서 여성의 역할은 20세기 영국의 시민사회와 과학에서 여성의 숨겨진 역사를 제공한다. 이 여성 중 상당수가 자신의 자녀를 통해 혹은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이들을 위해 난독증에 대한 일을 시작했음을 반복해서 강조할 가치가 있다. 간호, 직접적 경험과 전문 지식의 결합은 “과학적 진보”의 개념에서 있어 표준이 아니었다. 이것은 초기에 남성 정치인과 공무원이 난독증에 개입했던 모델은 아니었지만, 더 효과적이고 지속적인 것으로 밝혀졌다. (번역 김명호)

* 저자 필립 커비(Philip Kirby)는 웰컴 재단과 존 펠 펀드의 지원과 옥스퍼드 대학교, 세인트존스 컬리지의 팀원으로서 영국 최초의 난독증 아카이브를 제작하고 있다.

번역 원문
http://www.historytoday.com/philip-kirby/history-dyslexia

덧글

  • 홍차도둑 2018/02/04 13:24 # 답글

    오래전에 난독증에 관해 리더스다이제스트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이번 번역글처럼 증상에 대한 의학적 이야기는 많이 없고 한 부동산업자가 '글을 읽지 못함'에도 대학교 졸업까지 하고 교사까지 한 뒤 나중에 부동산업자까지 되서 잘 나갔는데도 글을 읽지 못했던 이야기고 나중에 나이 50넘어서야 전문학교에 가서 다시 처음부터 글을 읽는 법을 배웠다고 하네요.

    기사의 끝은 이러했습니다.
    [이제 그는 글을 읽게 되자 잊고 있던 상자를 열 생각을 했다. 그 상자에는 연애시절 그의 부인이 그에게 보낸 연애편지들을 담아놓은 상자였다. 이제 그는 부인의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 self_fish 2018/02/04 13:35 #

    리더스다이제스트다운 아름다운 글맺음이군요. ^_^
  • 2018/02/08 17:40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주원 2018/02/13 16:23 # 답글

    잘 읽었습니다. 항상 배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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