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 냉혹하고, 폭력적이며, 예측할 수 없는 by self_fish

영국의 국력이 강력해지면서 체포하는 해적들도 증가했고, 그들의 처형은 일상적으로 행해졌다. 
그러나 처형된 해적들이 남긴 가족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1759년 3월 14일 수요일 아침 조셉 할시 선장이 런던의 해적 처형장(Execution Dock)의 발판 위에 올라섰을 때 추운 아침이 밝아왔다. 지난 8월 할시는 지렛대로 한 선원을 폭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 달 뒤, 그는 또 다른 선원인 다니엘 데이비슨을 ‘pitch mop(역청을 용해해 발라놓은 대걸레의 일종_옮긴이)’이라 부르는 특정 무기로 공격했고, 공해에서 2건의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공개 처형 전날 밤, 할시는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자신이 고소당한 범죄를 묘사하긴 했으나, 대부분은 그녀를 위로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어머니. 나는 하늘에서 아버지, 형제, 자매 등 모두를 만나기를 희망합니다.’

“제가 이 세상에서 너무 이른 시기에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것에 대해 어머니께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언제나 어머니를 돕고 싶었습니다…제가 도움을 드릴 수 없다는 것에 너무 불안해 마세요. 제 셔츠와 버클, 모자를 집으로 보내겠습니다. 절 기억해 주세요……”

할시는 18세기에 공해상에서 일어난 살인이나 해적 행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수천 명의 남성 중 한 명이었다. 대부분 선원은 나쁜 의도를 가진 범죄자들이 아니었다. 바다에서의 생활은 힘들고, 폭력적이며, 예측할 수 없었지만, 항구 도시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일상적인 삶의 방식이었다. 해적 행위로 기소된 사람들은 종종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있었고,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한심한 몸싸움 뒤엔 살인 혐의가 빈번하게 제기되었다. 이런 선원들의 사형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가족과 공동체에 해가 되었다.

바다를 통제하다

대영 제국은 대서양과 그 너머로 지배력을 확고히 하면서, 왕실은 바다를 엄격하게 통제하려 했다. 국가에 일반적으로 위협이 되었던 살인을 일삼는 일부 해적들은 존재했다. 그러나 경쟁이 치열한 세계에서 많은 선원은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고, 또한 자신을 지원하는 국가에 줄 재화를 모으기 위해 배를 강탈할 수 있는 합법적인 허가를 받았다. 사략선(privateers: 민간 소유이지만 교전국의 정부로부터 적선을 공격하고 나포할 권리를 인정받은 배_옮긴이)으로 알려진 이들은 경쟁국의 선박을 공격할 수 있는 타국 선박 나포 면허장(letters of marque)을 갖고 바다를 누볐다.

그러나 일부 선원은 그런 허가 없이 선박을 공격하고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물건을 훔쳐서 지역 공동체를 돕거나 미국 식민지로 밀수입했다. 영국은 엄격한 무역 제한 아래 식민지를 관리했고, 다른 국가와의 거래를 금지했다. 따라서 지방 관리는 동인도 회사가 제공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저렴한 향신료처럼, 얻을 수 없는 물건을 사고파는 밀수꾼과 종종 손을 잡았다.

도둑질, 밀수 및 강도질은 서인도 제도와 인도양에서 영국의 교역 및 무역 파트너에게 피해를 준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 상황은 심지어 스페인과 프랑스 같은 유럽 경쟁국들에 긴장을 초래했다. 왜냐하면, 공격 선박이 국기를 게양하고 항해하는 것은 아니지만, 해적질은 왕실에 의한 침략 행위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영국이 대서양과 미국 식민지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법률의 통과, 불법 거래 및 무분별한 공격을 억제하고 주지사나 식민지가 해적과 동맹을 맺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제해권(maritime supremacy)을 보여주어야 했다. 결과적으로 교역은 더욱 제한되었고, 지역 사회는 영국 상품에 더 많은 세금을 지급하면서 더 가혹한 경제적 굴레를 짊어졌다.

17세기 초에 ‘해적’이라는 용어는 해군 고등법원(영국의 해사 법원)의 담당 하에 있는 공해나 해상에서 살인이나 강도 행위를 한 사람을 의미했다. 해적 행위는 영국 왕실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따라서 신에 대한 공격이기도 했다. 그러한 일에 가담한 선원들에 대해 키케로는 다음과 같은 용어로 언급했다. 모든 유형의 인간과 행동을 아우르는 ‘hostes humanis generis(인류의 적)’

경우에 따라선 해적은 선원으로서 정직한 삶을 떠나 스스로 선택하고, 독립하여 ‘모든 국가의 적’이 된 사람이었다. 상선과 해군 함정에서 식량과 임금은 형편없었지만, 해적선에서는 공식적인 경제적 제약 없이 더 나은 보급을 얻을 기회가 있었다. 다른 경우 해적들은 훔친 물건에서 그들의 임금을 취하도록 허락한 타국 선박 나포 면허장의 보호 아래서 부를 축적하고 유지하기 위해 평시에도 적의 배를 계속해서 강탈했던 사략선이었다. 또 다른 해적들은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 해적 행위를 강요당한 납치된 선원들이었고, 몇몇은 일회적으로만 해적 행위에 가담한 이들이었다.

해적으로 돌아선 이들의 사정이야 어떻든, 이들은 보통 지역 사회의 필수 구성원이었다. 해적질은 모험과 매력의 열기를 불러일으켰다. 해적은 대서양 전역의 항구 도시에서 환대와 보호를 받았으며, 가족이 있었고, 지역사회에서 존경을 받았다. 불행히도 그들의 지위는 불안정했고, 만약 영국 정부에 체포된다면 사형이 내려질 것은 거의 확실했다.

선원 공동체

선원과 결혼한 여성들은 도전적인 삶을 살고 있음을 알았다. 선원들은 일 년 중 몇 개월 동안 빈번하게 집 밖 생활을 했고, 가족에게 보낸 임금이 도착하기까진 시간이 걸렸다. 영국 해군은 선원의 임금을 최장 6개월간 체납하여 탈영을 방지했다. 그들의 아내는 임금을 청구할 수 있었지만, 대부분 최소한의 이익만 될 뿐이었다. 따라서 선원의 아내들은 보통 남편들이 일반적으로 맡아서 했던 사업들을 가끔 운영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부둣가 인근에서 살았다. 그곳은 항구에서 떨어져 있었고, 여관, 판잣집, 공동주택, 가게 및 개인 주택들이 줄줄이 들어찬 좁은 골목들이 미로처럼 나 있는 거리였다. 이곳은 도시의 거친 일면이었다. 건물은 보통 부서진 목재로 지어 습기로 인해 낡아 빠졌고, 거리에 만연했던 술은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일으킬 잠재성을 갖고 있었다.

선원들의 사망률은 다른 대부분의 직업보다 더 높았다. 선원들은 영양실조, 탈수, 부상 및 질병의 위험에 처해있었다. 바다에서의 생활은 궂은 날씨와 전투로 인해 위험했다. 만약 한 여성이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되면 (예를 들어 35세에도 여전히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경우), 그녀의 즉각적인 해결책은 재혼이었다. 그러나 재혼할 수 없거나 재혼하지 않은 여성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역사가 다니엘 빅커스(Daniel Vickers)에 따르면, 미망인을 위한 가장 일반적이면서 유리한 사업은 독한 술을 파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매사추세츠 세일럼의 선원 조합에서는 많은 미망인이 공공 기관의 허가를 받거나 혹은 야외에서 맥주, 와인 및 증류주를 팔며 자신의 집에서 술집을 운영했다. 비록 세일럼 대다수의 술집들은 남자들이 소유하고 운영하였지만, 소수의 여성은 자신의 업소를 운영하기 위한 면허를 얻었다.

가난에 쪼들리다

비록 일부 선원의 아내는 미망인의 처지에서도 미래를 장담할 수 있었지만, 바다나 법에 따라 남편을 잃은 많은 여성은 빈곤한 삶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선원의 임금은 잃고, 그들의 가족은 빚을 지게 된다. 선원이 해적질과 같은 범죄 혐의로 체포되는 경우, 가족들은 종종 그의 범죄 혐의를 사면받게 하려고 나선다. 많은 경우에 고소당한 해석들은 긍정적인 증언 덕분에 사면될 수 있었다.

그가 속한 지역사회 구성원들은 합법적인 일에 종사하고, 가족을 부양하며,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정직한 삶을 살며, 지역 사회에서의 지위 등 선행에 관한 증거를 제공했다. 헨리 에이버리 밑에서 항해를 했던 피의자 해적 로버트 실리는 ‘어린 나이를 동정받아’ 범죄에 대한 사면을 받았다. 판사는 어린 나이에서 오는 무지가 그를 잘못 판단하고 행동하게 했다고 느꼈다.

고소된 해적에 대한 사면은 ‘해적의 효과적인 통제에 관한 법률(1701)’의 통과 덕분에 18세기 시작부터 더욱 보편화 되었다:

“해적선에 가담했지만 거기서 벗어나려는 모든 사람이 사면될 수 있기를 바라며, 총독이나 총사령관, 혹은 해적을 도울 수 있는 권한을 가지 다른 이들이 그렇게 행하기를 약속함을……우리는 겸허히 제안한다.”

추가 조항은 지휘관이나 동료 승무원의 이름을 댈 경우 해적질에 대한 범죄를 사면했다. 그러나 모든 해적이 처벌에서 해방된 것은 아니었다. 선원으로서의 그들의 기술 때문에 많은 이들이 식민지로 보내졌다. 범죄에 대해 속죄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이 가난에 시달리는 자신의 가족과 마찬가지로 교수대 위에 올라선 자신을 발견했다.

1701년에 예정된 해적단의 처형은 필연적으로 그들의 지역 사회를 위협했다. 해적단의 아내들은 함께 연대하여 남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앤 여왕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작성했다. 42명(7명은 남성)이 서명한 이 청원서에는 남편의 죽음은 생계와 자녀들 그리고 지역 사회에 해롭다고 주장했다. 여성들은 여왕의 자비를 간청했다.

가족이 파괴되는 것에 더해, 청원자들은 유죄 판결을 받은 자들이 속죄함으로써 영국 왕실에 더욱 효과적으로 봉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계획은 해적 행위를 사면받고 왕실의 영향력을 보호하기 위해 의도한 것이다. 청원은 거절당했고, 남겨진 과부들은 곤경에 처한 가족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가족 사업

해적 행위로 사형 판결을 받은 사람들은 그들의 죽음이 가족에게 미칠 영향을 알고 있었다. 윌리엄 모리스 선장은 자신의 사형집행 전에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서 위로의 말을 전하고 자신이 죽을 준비가 되었음을 확신시켜 주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가져올 영향은 어머니를 넘어 더 넓게 영향을 끼칠 것이다. 모리스는 바다에서 일하면서 어머니와 함께 두 아이를 둔 홀아버지였다. 그의 죽음은 아이들에게 사회적인 배척과 가난을 의미했다. 편지에서 그는 아이들이 정직한 삶을 살기를 열망했다. 편지의 핵심은 자신의 소중하고 연약한 아이들에 대한 일차적인 보살핌을 그의 어머니에게 넘겨주며, 할머니로서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로서 아이들을 보살펴주기를 간청했으며, 아들은 어머니를 위해 신께서 그들의 마음에 선한 원칙과 도덕을 허락하기를 희망했다.

사형 집행 건수가 늘어남에 따라 재판과 고백에 대해 보고도 늘어갔다. 런던의 뉴게이트 교도소에 수감된 사람들은 성직자의 방문을 받았다. 그 성직자는 뉴게이트 교도소 목사였으며, 그의 일은 정죄 받은 자를 영적으로 돌보는 것이었다. 목사는 그들의 진술과 고백을 듣고, 관찰한 내용을 글로 써 뉴게이트의 [성직자 논평]으로 알려진 대중적인 출판물을 제작하는 인쇄업자에게 보냈다.

[성직자 논평]은 그들을 범죄의 길로 이끌었던 상황과 길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치명적인 결과에 관해 독자들을 교육하기 위한 것이었다. 해적들의 삶은 도덕적인 기준 아래 재단되었고,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가족 구성원의 이름은 기록해 공개되었기 때문에 피고인들은 자신의 행동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6세기와 17세기의 공판 기록은 남겨진 가족들이 이러한 곤경에 빠졌음을 보여준다. 해적 행위로 기소된 사람들은 단지 바다 위에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했으며, 다른 사람들처럼 가족에게 헌신적이었다. 해적으로 기소된 해적의 가족들을 친척들은 차례로 돌아가며 보호했다. 스테드 보넷(Stede Bonnet, 18세기 초반에 활동한 해적)의 재판에서 [성직자 논평]은 범죄 행위의 결과에 슬퍼하고, 해적과 여타의 선원들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져 너무 많은 미망인과 고아 및 가족들을 파멸시켰다고 선언했다.

월터 케네디와 같은 일부 해적들은 최후 연설에서 가족들을 향한 대중의 비난을 없애려고 했다. 처형장에서 케네디는 전통대로 ‘사형 전 연설’을 했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범죄를 인정하고, 참회를 구했다. 연설의 끝에, 그는 아내가 항상 그의 ‘악행’을 반대했던 신앙심 깊고 고결한 여성이었다고 주장함으로써 더 이상의 굴욕을 모면케 해주려 했다.

존 매시 선장은 1723년에 자메이카 연안에서 체포된 후 런던에서 해적 행위에 대한 범죄로 처형되었다. 감옥에서 그는 참회자의 역할을 했으며, 종종 성경을 읽거나 기도하는 모습이 뉴게이트의 [성직자 논평]에 의해 언급되었다. 그는 해적 처형장에서도 이 독실한 태도를 유지했다. 거기서 그는 품위 있고, 근엄하며, 회개하는 사람으로 기술되었다. [성직자 논평]에 따르면 매시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용기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성직자에게 자신이 죽은 후 가장 사랑하는 아내뿐만 아니라 친척들이 시신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관을 닫아 달라는 요청을 하지 않았다.

사형 선고가 내려진 해적들의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가족이 항상 무죄로 여겨진 것은 아니었다. 해적들과의 개인적인 관계 때문에 아내와 다른 가족들은 의심을 받았고, 때때로 더 넓은 지역사회에서 그들을 배척하여 더욱 취약한 상태에 놓이게 했다. 이것을 깨달은 한 해적은 뉴게이트 성직자에게 ‘그의 죄 없는 가족에 대해서는 비난하지 말 것’을 간청했다.

윌리엄 키드

가족에게 영향을 미쳤던 해적 범죄의 가장 널리 알려진 사례 중 하나는 1701년에 처형된 윌리엄 키드 선장 사건이었다. 원래는 동인도 회사와 관련된 해적이었던 키드는 역사상 최초의 거물 범죄인으로서 전설적인 명성을 얻었다. ‘해적’으로서 그의 지위는 의심스러운데, 왜냐하면 그는 항상 타국 선박 나포 면허장의 권리 하에 활동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불법적인 선박 나포에 관한 재판을 받았을 당시엔 그런 면허장의 발급은 없었다.

키드는 두 건의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첫째, 그는 인도양에서 무굴 제국의 배를 불법적으로 강탈했다. 헨리 에어버리라는 영국 해적에게도 불과 3년 앞서 배를 공격받았던 무굴은 영국이 키드를 잡는 데 최선을 다하던가 아니면 전쟁 행위로 간주하고 모든 교역을 중단하겠다고 했다. 그러므로 영국은 해적 행위를 억제하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키드를 본보기로 삼고자 했다. 이 기간에도 키드는 계속해서 악행을 일삼았고, 그의 선원 중 한 명인 윌리엄 무어에게 네덜란드 선박을 공격하고 명령했다. 무어가 거절하자 키드는 양동이로 그의 머리를 내려쳐 두개골을 골절시켰고, 그 부상으로 인해 다음 날 사망했다. 키드는 이제 살인과 해적 행위로 지명 수배를 받게 되었다.

아내의 범죄

키드가 근대 초기 최초의 미디어에 불을 붙인 것 중 하나는 그가 무굴의 배에서 훔친 30,000파운드가 넘는 보물을 묻어 놓았다는 소문이었다. 조사하는 동안, 또 다른 이가 그의 범죄와 관련한 혐의를 받았다. 바로 그의 아내 사라 브래들리 콕스 우드 키드였다.

사라 키드는 사라 브래들리의 이름으로 1645년경 영국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네 번 결혼했고, 세 번 과부가 되었다. 그녀는 1685년에 첫 남편인 윌리엄 콕스와 결혼했는데, 그는 4년 뒤에 익사했다. 그녀의 두 번째 결혼 날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콕스가 죽은 후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였던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인 존 오트는 1691년 5월 16일 키드와 결혼하기 위해 혼인 서약서를 신청하기 불과 이틀 전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결혼할 당시 키드는 부유했으며, 뉴욕에서 살며, 동인도 회사와 관련한 성공적인 사략선을 이끌고 있었다. 그러나 결혼 8년 만에 그녀는 지명 수배자의 아내이자, 자신도 지명 수배자가 되고 말았다.

키드는 자신의 원정에 자금을 지원했던 뉴욕 총독인 벨몬트 경과 오랜 친분이 있었다. 키드의 해적 행위 혐의가 만천하에 드러났을 때, 벨몬트는 키드를 체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배후 인물이었음을 증명하려고 애썼다. 왜냐하면 그의 명성은 키드로 인해 위태로워졌기 때문이다. 그는 키드의 해적 행위를 지원한 것이 아니란 걸 증명하기 위해 보스턴으로 키드를 유인했을 뿐만 아니라, 키드가 약탈품을 숨겨놓은 장소를 알 거라는 의혹으로 사라를 체포했다. 그녀가 감옥에서 고달픈 생활을 하는 동안, 그녀의 재산은 몰수되었고, 그녀의 하인은 심문을 받았다. 사라가 얼마나 수감되어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벨몬트는 체포를 정당화할만한 증거가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녀는 풀려났고 재산은 회복되었다.

뉴욕에서의 새로운 삶

한편, 키드는 재판과 사형집행을 위해 런던으로 이송되기 전에 보스턴 감옥에서 2년 동안 수감되어 있었다. 그는 시종일관 결백을 주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1701년 5월 23일, 키드는 해적 행위 및 살인 혐의로 처형되었다. 사라는 뉴욕에 남았다.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남편의 평판을 그럭저럭 피할 수 있었다. 1703년 크리스토퍼 라우스비라는 한 남자와 결혼했고, 키드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과 함께 뉴욕에서 조용한 삶을 살았다. 유언장과 유언 보관소 기록에 따르면, 사라는 라우스비가 사망한 후 선술집을 운영하기 위해 이전 결혼에서 모아둔 재산을 썼다. 그녀는 1744년에 죽을 때까지 이 선술집을 운영하였고, 남은 아이들에게 수입을 남겼다.

해적들은 오랫동안 무역을 마비시키고, 반란을 일으킨 무시무시하지만, 매혹적인 공해상의 범죄자란 평판을 받아왔다. 현실은 달랐다. 대다수 해적은 남편이자 아들, 아버지였던 남자들이었으며, 단지 자신과 가족, 지역 공동체를 위해 힘이 되기를 원했다. 그들의 행동 때문에 받은 처벌은 그들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부양가족들에게 오랜 고통을 남겼다. (번역 김명호)

* 글쓴이 레베카 사이먼(Rebecca Simon)은 근대 초 대서양에서 해적의 공개 처형을 주제로 킹스 칼리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녀는 로스앤젤레스에서 강의하고 글을 쓰고 있다.

* 번역 출처
http://www.historytoday.com/rebecca-simon/pirates-hard-violent-unpredictable

저장저장저장저장

덧글

  • 피그말리온 2018/03/03 23:01 # 답글

    이런걸보면 코에이의 대항해시대는 판타지로 빨리 장르를 바꿔야...
  • 나인테일 2018/03/04 00:15 #

    그거야 카탈리나나 하이레딘 같은 분들이 워낙에 우월한 스펙인 분들이니 그렇고 어설픈 해적들은 대항해시대에서도 주인공들 경험치 셔틀 밖에 안 되죠;;;
  • 홍차도둑 2018/03/03 23:24 # 답글

    잘 읽었습니다 ^^
    프라이버티어 는 제가 가지고 있는 '해적의 역사' 라는 책에서는 '사략선'으로 번역되더군요
  • self_fish 2018/03/04 14:44 #

    알려주신대로 사나포선보단 사략선이란 단어가 더 나은 듯 합니다. 감사합니다. ^^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