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대학 독점 by self_fish

중세 유럽 전역에서 새로운 대학들이 빠르게 등장했지만, 19세기 초 영국에는 여전히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두 대학밖에 없었다. 수 세기 동안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두 교육 기관은 법으로 시행되었던 고등 교육에 대한 엄격한 독점권을 누렸다. 왜 그들에게 그런 특권이 허용되었던 걸까?
중세 대학에서 강의하는 교수. 제네바, c.1525.

1686년 6월, 성직자와 그의 부인 및 딸로 이루어진 작은 가족이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의 부두에 발을 디뎠다. 그들은 방금 영국을 탈출해 대서양을 가로질러 한 달 또는 그 이상의 긴 여정을 끝낸 터였다. 성직자이자 학자인 찰스 모턴(Charles Morton)이란 이름의 60대 남성은 영국 정부에 고발된 후 달아나고 있었다. 그는 무슨 범죄를 저지른 것일까? 학생을 가르쳤던 것, 더 구체적으로는 북런던의 학생을 가르친 일이었다.

1334년 이후로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졸업생들은 이 두 영국 대학 외에는 강의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해야 했다. 옥스퍼드에서 나온 일군의 학자들이 링컨셔의 작은 마을인 스탬퍼드에서 새로운 대학의 설립을 시도한 사건으로 인해 1333년 금지한 사항이었다. 분리를 시도했던 이들은 중세 대학 생활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폭력과 혼란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학생들 사이의, 그리고 학생과 마을의 다른 공동체 간의 빈번한 폭력은 사실 초창기 세대의 학자들이 옥스퍼드를 떠나 케임브리지로 이사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이제 두 대학 모두를 위협했으므로 스탬퍼드의 실험은 억압되어야 했다. 이를 위해 링컨의 주 장관이자, 대법관, 심지어 왕이기도 했던 에드워드 3세는 역량을 발휘했고, 그 결과는 ‘스탬퍼드 맹세(Stamford Oath)’로 알려지게 되었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졸업생들은 1827년까지 계속 맹세했다.

찰스 모턴이 런던의 뉴잉턴 그린에 자신의 학교를 설립하여 이 맹세를 깨뜨린 것에 대해 고발된 것은 운이 없고 드문 일이라는 지적은 사실이다. 대니얼 디포(Daniel Defoe: 《로빈슨크루소》를 저술한 영국의 저널리스트 겸 소설가)와 같이 다수의 인상적인 학생을 모집하는 데 있어서 그의 명백한 성공은 문제의 일부였을 뿐이다. 모턴은 장로교로서 충실한 종교적 신념과 그의 급진적인, 공화주의자적 정치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스탬퍼드 맹세의 우울한 영향이 끼치는 피할 수 없는 상징주의는 부인할 수 없다. 졸업 때마다 반복되고, 두 대학의 학칙이 연이어 개정됨에 따라 고등 교육에서의 독점력을 유지하겠다는 그들의 결심은 확고했다.

유럽의 경우와는 아주 대조적이었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가 설립되고, 졸업생을 배출할 고유한 권리를 감시하던 시기에 유럽 대륙 전역에는 점점 더 많은 대학이 설립되었다. 14세기에 피사에서 프라하, 크라쿠프(폴란드 남부 도시)에서 카오르(프랑스 남서부 도시)에 이르기까지 도시에는 새로운 교육기관이 나타났다. 지난 수년간 영국 대학과 유럽 대륙의 대학들 사이의 수적인 격차는 더욱 커졌고, 1500년대 이후 유럽에서 설립되거나 재설립된 대학의 수는 100개가 넘었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는 영국의 유일한 대학으로 남아있었다. 사실 17세기 중반에 모턴의 시도가 성공했더라도, 네덜란드의 나이메겐과 슬로바키아의 프레쇼프와 같은 예상 밖의 작은 마을에서조차 대학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영국의 경우는 글래스고 대학이 문을 연 1451년과 에든버러 대학이 설립된 1582년 사이에 5개의 대학을 가졌던 스코틀랜드와도 매우 달랐다.
윌리엄 R. 쉐퍼드의 히스토리컬 아틀라스(Historical Atlas)의 중세 대학 지도, 1923.

그뿐만 아니라, 스탬퍼드 맹세를 폐지한 1827년은 영국 전역에 대학이 생겨난 해였다. 더럼 대학은 1833년에 문을 열었다. 런던 대학은 1836년에 설립하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빅토리아 시대가 끝나갈 무렵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모두 새로운 교육 기관 설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두 대학의 지지가 없었다면, 영국의 다른 많은 시립대학(civic universities)은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 세대 남짓한 시간 동안 영국의 고등교육계는 크게 변화했을 뿐만 아니라 경쟁을 차단했던 바로 그 대학들이 경쟁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의문, 아니 몇 가지의 의문을 떠오르게 한다. 우선, 왜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가 그렇게 다른 대학의 등장을 억압하는 데 열중이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둘째로, 그들은 무슨 수로 다른 대학의 등장을 억압하는 데 성공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마지막으로, 앞서 질문만큼이나 중요하면서 더 흥미로운 것은 1827년 이후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입장을 완전히 뒤집게 했는가 하는 의문이다.

어떤 면에서는, 옥스브릿지(Oxbridge: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를 일컫는 말)가 왜 다른 대학의 지위에 대해 그렇게 질투심을 느꼈는지에 대한 질문이 가장 답하기 쉬워 보인다. 가장 일반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독점적인 상품, 말하자면 대학 학위를 제공하는 기관은 자신들의 독점을 보호하기 위해 조처를 하는 것이 타당하다. 대학은 원래 일종의 직인 길드(trade guild)에 지나지 않았다. 학생과 교수는 별개의 단체이며, 이들은 입학을 통제하고, 학교의 수준을 관리하며 지역 당국과 협상했다. 정육점과 제빵사들이 자신의 기술 공급을 제한하려고 노력한 것처럼, 대학 내의 교수들은 자신의 독특한 권리를 보호하길 원했다. 이 특권은 경쟁자들에 의해 위협받았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는 자신들의 기원을 잃거나 잊은 후에도 여전히 길드처럼 행동했다. 그래서 17세기에도 그들은 칼라일과 런던, 리폰과 슈루즈베리와 같은 여러 곳에서 고등 교육 기관을 설립하려는 시도에 맞서 싸웠다. 그래서 1660년대 초 더럼 대학교를 짓밟았다. 그래서 그들은 가난한 찰스 모튼을 뒤쫓았다.
존 스피드의 옥스퍼드 지도, 1605

어째서 그들이 이런 일을 하도록 그냥 내버려 둔 것일까? 이런 제한적인 관행을 허용한 사람들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현재의 정부는 1965년 4월 노동당의 토니 크로슬랜드부터 2018년 2월 테레사 메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교육 기관을 육성하는데 열성인 정치인들과 함께 고등 교육에서의 경쟁을 끝도 없이 옹호하고 있다. 과거에 강력한 권력을 가졌던 사람들은 왜 지금과는 그렇게나 다른 견해를 취했던 것일까? 왜 그들은 일종의 학문적 독점을 용인했던 것일까?

답은 통제다. 두 대학이 교사와 학생의 공급을 통제하기를 원했던 것처럼, 영국 교회와 정부는 대학을 통제하기를 원했다. 실제로 대학은 사람들이 잘못된 것을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위험한 이단의 원천일 수 있었다. 옥스퍼드는 14세기에 초기 프로테스탄트 롤라르드 운동(Lollard movement: 위클리프를 따르는 존 오브 곤트의 이단파)으로 종교개혁을 탄생시켰다. 케임브리지는 200년 후 순교자 로버트 반스(c.1495-1540)와 토마스 빌니(1495-1531)와 같이 인본주의자들에게 영감을 받아 교회 개혁을 이끈 두려운 복음주의자들의 둥지를 틀어주었다. 단지 두 개의 대학으로 신학적 논쟁을 통제하고, 심지어 한 대학을 감독하기 위해 다른 대학을 이용하기가 더 쉬웠다. 프로테스탄트 성향의 케임브리지에서 교육받은 휴 라티머 주교와 니콜라스 리들리 주교를 또한 케임브리지에서 교육을 받은 토마스 크랜머 대주교와 함께 왕당파이자 가톨릭 성향인 옥스퍼드로 보낸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1550년대에 화형당했다.
캔터베리의 대주교 토마스 크랜머는 옥스퍼드의 화형대에서 화형당했다, 1556

정치적으로도 대학은 체제 전복이 논의되고 심지어 조장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함으로써 권력에 큰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 토머스 홉스의 비히모스(Behemoth, 1668)에서, 이 철학자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가 최근 내란(명예혁명)에서 ‘반란의 핵심’인 반역의 요람이었다고 주장했다. ‘대학은 국가에 있어 트로이 목마와 같다’고 홉스는 결론지었다. 그가 과장했을지 모르지만, 이는 1480년대 헨리 7세에 대해 음모를 꾸몄거나 1720년대 스튜어트 왕조의 승계를 주장했던 이들이 옥스퍼드 출신인 것과 상관없이 학생과 학자가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에 대해선 의문의 여지가 없다. 대학이 많을수록 문제가 발생할 확률은 높아지고, 통제력은 떨어진다.

정치적, 종교적 분열은 유럽 대륙에서 중앙 집중식 통제를 포기하게 했다. 1790년대까지 독일에는 34개의 대학이 있었고, 이탈리아에는 26개가 있었다. 심지어 스페인에도 23개가 있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영국은 14세기에서 19세기까지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가 지배했고, 이는 거래의 산물이었다. 두 대학이 권력을 보호한다면, 권력은 두 대학을 보호할 것이었다. 에드워드 3세에 의해 만들어지고 두 대학에 의해 시행된 스탬퍼드 맹세는 결과적으로 그 사안이 무엇인지, 심지어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선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나타내는 것에 의미가 있었다. 즉, 대학과 강력한 영국 정부 사이의 상호 지원적인 동맹이었다.

이 동맹 관계가 옥스브릿지가 경쟁자를 막는 데 성공한 원인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이 관계의 붕괴는 또한 다음에 일어난 일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1820년대는 교회, 정부 및 두 대학 모두에게 심각한 위기의 시기였다. 1828년 반대자들에게, 1829년엔 로마 가톨릭에 완전한 시민적 자유를 부여하기로 한 결정은 영국 교회와 정부 사이의 독점적 연계의 붕괴를 반영하고 이를 법으로 제정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특권적 위치에 의문을 제기했다. 시인이자 비평가인 매튜 아놀드가 훗날 옥스퍼드에 대해 ‘좌절된 주의(主義), 버림받은 신념, 인기 없는 명성, 불가능한 충성심’의 발상지로 언급한 대로, 그 둘은 여전히 영국 성공회교 신앙의 보루이자, 여전히 정부의 고해성사실로서 충성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환경에서 스탬퍼드 맹세는 폐지되었고, 새로운 대학의 설립을 계획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niversity College London or the University of London)은 원래 명칭 그대로 어떤 교회와의 관계도 없이, 정부의 허가 없이 1828년에 문을 열었다. 이 대학은 현존하는 두 대학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고, 우파 언론인들은 ‘대학이란 명칭을 주장할 수 없는’ 교육기관이며, ‘교회도 없다, 왕도 없다, “그 무엇도” 없다’고 조롱했다.

그러나 내켜 하지 않은 정부와 이 신흥 대학을 억압할 수 없었던 교회 때문에 두 교육기관의 독점은 깨졌다. 왕당파, 성공회 주의자들은 이에 부응해 적절하게 종교적이며, 대단히 기득권적인 킹스 컬리지 런던(King’s College London)을 설립해야 했다. 더 심각한 것은, 1830년대 초 더럼 주교는 북부 지역에 대학을 설립하기 위해 자신의 엄청난 자원 일부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정부가 자신의 수입을 압류할 것이라는 걱정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옛 정권이 끝났다는 것은 분명했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는 독점권을 잃었다.

그러나 킹스 컬리지 런던과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은 인가받은 대학의 일부가 되고, 런던 연합대학(federal University of London)과 더럼 대학 또한 완전한 대학으로 인정받았지만, 그 밖의 영국의 다른 교육기관들은 수십 년 동안 그 지위를 얻지 못했다. 1880년대까지 맨체스터 대학은 영국의 5번째 대학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를 탓할 수 없었다. 그들은 다른 교육기관을 억압하는 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설령 그들이 원했다 해도,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영국의 도시들이 대학을 잃게 된 것은 무관심과 재정적 후원자의 부족 때문이었다.
종교가 없는 런던 칼리지 대학, 19세기

실제 놀랍게도, 1870년대부터 옥스브릿지는 새로운 교육 기관의 설립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예를 들어, 브리스톨에서는 옥스퍼드 발리올 칼리지의 수장인 벤저민 조엣이 1876년에 대학의 수석 발기인 중 한 명으로 활동하였다. 발리올과 뉴 컬리지는 이 야망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정기적으로 기부했다. 셰필드, 레딩과 노팅엄에서 케임브리지가 주최한 일련의 대학 강의는 현지인들이 그들에 상당하는 기관을 창립하도록 자극하는 역할을 했다. 이 프로그램이 직계 후손 중 하나인 노팅엄 트렌트 대학의 현관에는 옥스퍼드 대학과 케임브리지 대학의 문장을 여전히 볼 수 있다. 이는 단지 노팅엄 트렌트 대학이 연합의 지위를 원했을 뿐만 아니라, 두 고대 교육기관이 적극적으로 설립을 지원했기 때문에 그곳에 있었다.

그들은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게 했다. 우선, 두 대학은 국가가 그들에 대한 권력을 유지하고, 그들에게 이 권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도록 강요받았다. 개혁가들에게 이것은 변화를 촉구할 기회를 제공했다. 보수주의자들에게 그것은 개혁을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했다. 새로운 칼리지(colleges)의 설립을 지지하는 것은 개혁가나 보수주의자 모두 동의할 수 있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한편으론 고등 교육에 대한 접근을 넓히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론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로부터 관심을 돌리게 하여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두 고대 대학(ancient universities) 내의 많은 이들 역시 새로운 칼리지의 설립을 추진했던 것도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중요성과 영향력을 실제로 증가시킬 수 있기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브리스톨에 대한 조엣의 지원은 주립 칼리지(provincial colleges)가 옥스브릿지를 위한 피더 스쿨(feeder schools: 같은 지역의 특정 상급 학교에 학생들을 보내는 역할을 하는 학교)로서 활동하는 연합 대학(federal university)이라는 광범위한 계획에서 비롯됐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역설적이게도 경쟁을 억제하기 위한 싸움에서 졌기 때문에, 이제 그들은 체제의 확장을 지시함으로써 통제를 위한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너무 미미했고, 너무 늦었다. 개혁은 아직도 옥스브릿지에서 진행되고 있고, 1901년에 이르러 적절한 위치에 있는 이들은 시민 단체에서 실질적인 독립을 발전시키고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 [고대] 대학들은 자신의 창조자를 위협할 프랑켄슈타인을 만들었을까?’ 고전주의자 루이스 캠벨은 물었다. ‘더 새로운 성장이 궁극적으로 오래된 것을 대신하게 될까?’ 일단 스탬퍼드 맹세가 끝나고 고등 교육의 새로운 세계가 가능하게 되었다. 영국의 100개가 넘는 고등교육 기관에서 이 문제는 여전히 유효하다.(번역 김명호)


글쓴이 윌리엄 와이트(William Whyte)는 [근대 대학: 영국의 시립 대학의 사회적 및 건축학적 역사(Redbrick: A Social and Architectural History of Britain’s Civic Universities. Oxford University Press, 2015)]의 저자이다.

-출처-
https://www.historytoday.com/william-whyte/medieval-university-monopoly


덧글

  • 까마귀옹 2018/03/24 14:04 # 답글

    결국 '독점'과 '통제' 때문이었네요.

    이게 우리나라의 이른바 '명문대 학연'과 비교해 보니까.......어딘가 기분이 싸늘해지네요.
  • Barde 2018/03/24 17:48 #

    동감합니다.
  • as 2018/03/27 04:16 # 삭제 답글

    런던대학은 UCL로 일관되게 번역하는 게 나아보여요. 우리말 '대학'은 칼리지와 유니버시티를 구별하지 않는데 UCL은 엄연히 칼리지니까요. 또 Reading은 '리딩'이 아니라 '레딩'으로 전사해야 맞아요. 설기현선수가 뛰었던 축구팀도 '레딩'이었죠.
  • self_fish 2018/03/27 08:25 #

    틀린 부분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정하였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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